긴 냉담을 거쳐 다시 교회로 돌아온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왜 사춘기 시절 내가 그렇게 열심히 교리 공부를 했을 때, 본당에서 마귀의 존재와 활동에 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라는 점이었다. 지옥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야 그것이 우리 선조 신앙인들이 중세와 그 이후에 걸쳐 저지른 신앙의 오용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지만, 이 두 가지가 빠진 교리는 그 자체로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우리 개개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절절하게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으니, 나를 비롯한 수많은 청소년이 인생의 어떤 모퉁이에서 쉽사리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이유를 그래서 나는 이제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교리에는 ‘가슴’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빛과 그림자도 없고, 분노와 눈물도 없고, 그저 맹숭한 경건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겨우 사제들과 교리교사와 동료들의 인간적 온정과 그 불완전한 사랑에 기대어 있었던 것이다.
이 악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건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들을 ‘거짓의 아비’라고 단순하게 정의하셨던 것을 떠올렸다. 또한 이 세상에 ‘하얀 거짓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거짓과 진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단어처럼 자기 기만적인 교만이 또 있을까.
언젠가 내가 참으로 순수하게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던 한 시절, 나는 그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마음속에 작은 모래 폭풍 같은 것이 심하게 일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지금도 내 갈등의 가장 큰 부분은 내가 자꾸만 ‘하얗다’라고 나 혼자 주장하는, 하얗고 노랗고 검은 거짓말들을 일상에서 자꾸 하게 된다는 것임은 물론이다. 지난번 글에서 영국 A6 도로에서의 살인범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 앞에서 했던 그 거짓말을 보면 짐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거짓의 사람들」에 나오는 수많은 예시 중 가장 압권은 역시 그가 가톨릭 사제들과 함께 정신과 의사 자격으로 구마에 참여하는 부분일 것이다. 피구마자 속의 마귀는 처음 자신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이 몸에서 나가면 구마자(저자 스캇 펙) 의 가족에게 들어갈 것이라고 겁을 준다. 그때 섬뜩해졌던 그는 악이 결국 거짓의 아비라는 생각을 하며 겨우 그 공포의 협박에서 빠져나온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소녀 속에 들어있던 마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애처로운 소녀의 슬픔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때 단호하던 구마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르시시스트를 연구하는 의사들이 하는 말, ‘나르시시스트의 마지막 말은 늘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것이 이와 상통한다. 스캇 펙 역시 악을 일종의 나르시시즘으로 정의했다.
나는 가끔 성모님께서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 그 어린아이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셨던 것을 생각한다. 지금으로 치면 아동 학대에 해당할 만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셨다.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옥은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악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악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말이니까.
그리고 이 어려운 시대의 복판에 서서 온갖 인간적인 고뇌들로 시달리며 이제 나는 겨우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유혹은 여자도 남자도 돈도 학력도 명예도 아니고, 하느님은 없으며 기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력한 것이라는 속삭임, 네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세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속삭임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 중에 늘 빌어 본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소서. 부디 아멘.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