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

우세민
입력일 2025-02-19 06:37:30 수정일 2025-02-19 06:37:30 발행일 2025-02-23 제 3430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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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00년경 스미르나는 완전히 무너진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에 이르러 스미르나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도시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로 자신을 소개한다.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해석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에 대해 우리는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살아 있으되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궁핍을 겪을 때가 많다. 어쩌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는 죽을 만큼 힘든 일들 앞에 크나큰 희망으로, 그리하여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살 것인지, 또 죽을 만큼, 아니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아파하며 간절히 묻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예수님 그분이 주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는 시험, 환난, 충실 등등의 단어로 독자들을 단단히 준비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의 공동체가 다른 어떤 곳보다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서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유다인들의 비난과 괴롭힘이 끊이지 않은 곳이 스미르나였다.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이방 문화와 종교에 친화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다인들은 곳곳에 자리 잡아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적대적이었다. 다른 문화에 호응하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고 유다 문화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에겐 혹독했다. 사도행전은 그런 유다인들의 태도가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사도 13,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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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스미르나의 유적. 박병규 신부 제공

비난과 모독, 박해를 살아가는 스미르나 공동체는 궁핍했으나 부유했다.(묵시 2,9 참조) 궁핍을 가리키는 그리스말 ‘프토케이아’(πτωχεία)는 그야말로 물질적 가난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현실적 가난을 영성적 풍요로움을 이해하는 인식의 자리로 규정하곤 했다.(2코린 6,10; 야고 2,5 참조) 현실의 어려움이 더없이 클지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이 ‘가난함’이 품고 있는 의미라는 것. 고통의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되고, 슬퍼하는 일들이 행복의 기회가 된다는 ‘자기 계발서’ 형태의 정신적 위로나 격려 따위의 충고가 아니다. ‘가난’은 가난한 것이고, 그로 인한 힘겨움은 폐부를 꿰뚫는 아픔을 동반한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되새겨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5-6) 믿음의 부자가 된 것은 가난을 탈피하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걷어낸 결과론적 선물이 아니다. 믿음이 풍요로워 부자가 되는 것은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는 형제애적 실천의 다른 말이다. ‘가난’은 그리하여 공동체가 함께하는 친교의 ‘원형’을 가리키는 상징체가 된다. 

없는 사람이 더 없는 사람을 생각해준다는 일상의 경험칙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사람은 경쟁이나 노력을 당연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나누고 함께하려는 사람은 무한 경쟁과 숨 막히는 노력이 벌어지는 삶의 자리 뒤켠에 지쳐 쓰러지는 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지닌다. 믿음의 부자는 이렇게 사람을 챙기는 일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형제적 친교를 사는 일이 믿음이 걸어가는 풍요로운 길이다. 스미르나 공동체는 가난했으나 그 가난으로 부유한 친교를 살아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비난하고 시기하고 심지어 괴롭히는 이들은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타민족이나 다른 사상을 단죄하고 멸시한 유다인들은 실은 ‘유다인’이 아니라는 것. 흔히들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이 90년 유다의 얌니아 종교회의(그리스도인들을 유다 사회에서 배척하고 저주하는 결정적 자리) 이후에 적혀진 글이라 반유다인 정서를 배경으로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 구도를 적고자 한 게 요한계 문헌은 아니다. 참된 하느님 백성, 유다인은 혈통이나 육욕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요한 1,13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사건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다고 초대교회는 생각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의 자리임을 선언하는 것이 참된 유다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되어, 사람을 하느님처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이 참된 유다인의 일이어야 했다. 저들끼리 모여 회당에서 하느님을 칭송하지만 사상과 신념, 문화의 차이를 절대적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 이 땅 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횡포를 저지르는 이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고 ‘사탄의 시나고가’(우리말 번역에는 ‘무리’라고 되어있다)라고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는 단언한다.(묵시 2,9)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열흘’의 환난을 겪을 것이다.(묵시 2,10) ‘열흘’을 두고 구약의 다니엘이 겪는 고초를 떠올리기도 한다.(다니 1,12 참조)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고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어도 용모가 뛰어나는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열흘’의 시간을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의 시간 개념으로 바꿔놓는다. 열흘 동안의 환난은,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시험할 기회다. 충실히 믿음을 지키면 승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될 것이다. 

사는 게 힘들고 무너질 때, 행복과 성공을 갈망하다 제 삶의 참된 가치를 타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몸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제 신념의 죽음(두 번째 죽음)에 괴로워할 때가 있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내가 그렇게 행동했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 죽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왜 사는가’를 묻는 것, 믿음의 충실성을 되짚어보는 이런 질문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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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