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묵시 2,1-7)

우세민
입력일 2025-02-12 09:04:27 수정일 2025-02-10 14:39:47 발행일 2025-02-16 제 3429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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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지녔던 사랑 저버린 에페소 교회 나무라는 내용
그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 친교 이루는 신앙의 본질

처음에 사랑이 있었고 불행히도 그 사랑은 추락하고 말았다. 에페소에 보낸 편지는 ‘추락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추락한 사랑을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와 여러 신들을 모시는 신전들 탓으로 돌린다. 그도 그럴 것이 에페소에는 기원전 29년부터 아우구스토 황제의 명에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위한 신전이 있었고, 수렵과 궁술,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역시 존재했었다. 그래서 이방 문화와 종교들 틈바구니에 흔들리는 신앙인의 모습을 두고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에페소 교회에 말하는 이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는 이’다. ‘쥐다’(κρατέω)라는 말은 ‘가지다’라는 말보다 강력하다.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방점이 찍혀 해석된다. 예수님이 교회의 근본이자 목적이라는 것. 쥐어진 일곱 별은 일곱 교회를 대표하는 천사를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를 꼭 붙들고 챙겨주고 보듬어 주는 신적 보호로 ‘쥐다’라는 동사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데 그 한 가운데를 거니는 분 역시 예수님이다. 우리말 번역은 일곱 교회 ‘사이’로 되어 있지만, 부정확한 번역이다. ‘사이’로 번역된 ‘엔 메쏘’(ἐν μέσῳ)는 공간적 일치를 가리킨다. 일곱 교회와 함께 하나 되어 머무시는 예수님을 ‘엔 메쏘’라는 말마디가 암시한다.

일곱 교회와의 일치는 이 말마디 하나로 더욱 강조된다. “나는 … 안다.”(묵시 2,2) 예수님은 에페소 교회가 행하는 일과 노고와 인내를 알고 계신다. 일, 노고, 인내라는 단어들은 모두 현실 속에 살아가는 신앙인의 ‘수고’(受苦)를 가리키는 것으로, 요한묵시록은 행복과 안식을 향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가르친다.(묵시 11,13)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삶이 슬프고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알아주신다는 이유만으로 그 힘든 삶은 살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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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박병규 신부 제공

에페소는 여러모로 훌륭하고 모범적이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건 노력이나 희생, 혹은 성실함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딱 하나가 부족한 것이었고, 그 하나가 편지를 쓰게 된 동기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묵시 2,4) 에페소 교회의 ‘첫사랑’을 두고 요한계 문헌, 그러니까 요한복음, 요한의 편지들을 근거로 해석하곤 한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믿는 이들은 구원의 자리에 머문다는 것.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첫사랑’은 그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가 된다. 많은 신앙인이 행하는 일과 노고와 인내는 어쩌면 부수적인 것일지 모른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 본질적으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타자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노력이 아무리 성실하고 완벽하다 할지라도 상대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숱한 삶의 경험들 안에 ‘타자’가 잊혀진 채 이루어지는 ‘선한 폭행’을 경험하고 있지 않나.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은 에페소 교회에 채근한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라’고.(묵시 2,5) 그 ‘어디’는 추락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더 사랑하라’가 아니라 어디서 추락했는지, 어디서 벗어났는지, 그리하여 어디서 사랑을 잃고 헤매는지 살펴보라는 말이다. 에페소 교회의 본디 자리는 ‘사랑’이었으나 그 ‘사랑’을 잃어버린 곳이 어딘 지에 대한 질문은 태초의 인간을 향해 던져진다.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그 둘은 하느님과 결별하여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 인간은 본디 하느님과 조화로운 관계 안에 있었으나, 그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지혜서 7장 3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나도 태어나서는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같은 땅에 떨어졌으며 첫 소리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우는 것이었고….” 화려했던 솔로몬 역시 한계 지워진 인간의 처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는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인간 삶에 대한 부정적 해석은 하느님과의 조화로운 세상을 향한 갈망의 긍정적 해석이다.

그러므로, 첫사랑의 회복은 인간의 근본적 삶에 대해 또 다시 질문하는 일로 시작한다. 우리는 본디 ‘관계 안의 존재’였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서로에게 ‘알맞은 협력자’로 창조된 것이 인간이었다.(창세 2,18 참조) 인간이 진정으로 제 존재 양식을 구현하는 일은 무엇일까. 에페소에 보내는 편지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에게 좋은 점도 있다. 네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것을 싫어한다.”(묵시 2,6) 니콜라오스를 두고 역사의 한 인물로 규정하는 노력은 많았다.

예컨대, 사도행전의 ‘니콜라오스’는 초대교회의 일곱 부제 중 한 분이셨다.(사도 6,6 참조)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니콜라오스였다. 혹자는 니콜라오스를 따르는 신앙인의 무리가 교회 내부에 있었고, 니콜라오스의 모범을 추종했던 그 무리가 엄격주의로 빠져들면서 신앙의 게으름을 탓하는 배타적 무리가 되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굳이 역사의 한 인물로 시작한 이런 해석을 절대화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신앙 공동체에서도 이런 정황은 발견되니까. 제 신앙의 가치를 절대화해서 다른 이의 신앙을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일, 제 노력을 정당화해서 다른 이의 노력을 게으름이나 일탈로 규정하는 일, 모두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과 유사한 것들이다.

기억하자. 우리는 ‘승리하는 사람’이다. 단절과 소외, 비난과 무시에 승리하여 인간 본연의 자리를 다시 질문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낙원에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함께’ 먹을 사람들이다.(묵시 2,7 참조) 인간은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인색한 오늘, 경쟁과 노력에 흠뻑 젖어 인간다움을 한낱 행동 방식의 문제로 격하시킨 오늘, 우리는 첫사랑이 그립다. 사랑은 다른 이가 그 다른 이로 존재할 수 있도록 알맞게, 세심히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