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칼럼] 죄에서 벗어날 순 없지만, 구원을 받을 순 있다

최용택
입력일 2025-03-31 13:33:01 수정일 2025-03-31 13:33:01 발행일 2025-04-06 제 3436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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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필리핀 마닐라의 바클라란 성당에서 봉헌된 재의 수요일 미사 중, 한 신자가 이마에 재를 받고 있다. OSV

올해는 전 세계를 휩쓴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의 대량 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한 이 전쟁으로 전 세계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전승 기념행사에서는 패전국들의 잔혹 행위가 강조되고, 승전국의 용기와 희생이 칭송받을 것이다. 물론, 승전국의 목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모든 수단이 정당했던 것은 아니다.

1945년 3월 9일부터 10일 밤, 미군의 도쿄 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심지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공격, 그리고 독일의 드레스덴과 함부르크 폭격보다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단 하룻밤 만에 최소 10만 명이 죽었고, 100만 명 이상이 다치거나 집을 잃었다.

미군 폭격기는 도쿄 동부 저소득층 지역을 목표로 소이탄을 투하했다. 이 지역의 집들은 나무와 합판으로 지어져 있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이 불가피했다. 이 공격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 지역의 많은 남성들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보내졌기 때문에, 당시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주로 노인, 장애인,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다. 군사적 가치가 거의 없는 민간 지역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이는 명백한 전쟁 범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주요 교전국들은 이런 ‘무차별 공습’을 자행했다. 역설적이게도 중국에서의 일본군과 스페인에서의 독일군이 처음으로 이런 무차별 공습을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승전국들은 자신들의 전쟁 범죄에 대해 반성하거나 애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770년, ‘보스턴 학살’ 사건으로 기소된 영국군 병사들을 변호했던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John Adams)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실은 완고한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이나 감정, 혹은 열정이 어떠하든, 그것이 사실과 증거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참고로, 당시 병사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8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사실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때, 당시의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결코 그들보다 더 정의롭거나 더 윤리적인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교회, 국가, 지역 사회, 기업, 학교, 심지어 가족조차도 때때로 부당한 행위를 저지르거나 묵인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불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범죄를 포함한 승리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환경 오염, 무책임한 자원 채굴, 불공정 무역, 노동 착취 등의 부정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직접 이러한 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것의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는 이사야서 6장 5절의 탄식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사순 시기가 되면 우리는 주로 개인적인 죄와 나약함을 성찰하며, 회개하고, 주님 부활 대축일을 통해 세례 때의 다짐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집단적 죄악, 예를 들어 인종 차별이나 환경 파괴 같은 문제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즉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원죄'의 한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둔 지금, 교회가 선포하는 진리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로 모든 죄를 이기셨다. 이것은 단지 나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죄로 물든 환경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7장 18-25절의 말씀은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서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미 구원받았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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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