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또 하나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앞에서

박효주
입력일 2025-04-23 09:52:45 수정일 2025-04-23 09:52:45 발행일 2025-04-27 제 343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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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활동은 말씀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가엾은 마음’과 특정 대상에게 내미는 손의 촉감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되어 간다. 차갑고, 딱딱하고, 마음 없는 기계와 접촉하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과 미래 세대에게, 타인에게 공감하는 연민과 손길이 닿는 접촉의 힘이 과연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는 요즘이다.

산업혁명 이후 200년, 이제는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삶의 여러 부분이 큰 변혁의 문턱을 넘었다.(교황청 AI 연구 그룹 저 「인공지능과 만남」 참조) 인간의 성장은 한계를 모른다. 이 과정은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창세 11,3) 과연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멈춰 단지 외적 발전이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이유인지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고귀하고 탁월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위대한 목표와 가치’에 대한 인본주의적 이해가 간과된다면(「찬미 받으소서」 181항 참조) 아무리 훌륭한 혁명이라도 실패할 수 있다.

대학에서는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는 인문 사회학 부문의 학과들이 사라지고 있다. 물질적인 안정과 풍요, 그리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나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인문학이 설 자리가 없으니, 물결처럼 밀려와 우리 앞에 우뚝 선 4차 산업혁명, 인간처럼 작동하는 AI 로봇을 과연 어떤 철학적 가치 아래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디지털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는 인공지능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 조절이 어려운 단계로 진입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가변성(Variability)과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는 디지털 알고리즘의 두 가지 쟁점은 직시해야 할 부분이다. 벌써 몇 년 전에 학생들과 TED talk(학술 강연 비디오) 시간을 통해 만난 인간형 휴머노이드 로봇 소피아. UN에서 자신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공신경망을 통해 복잡한 학습 과정을 거쳐 예술 분야도 학습해 보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내 경악한 적이 있다. 인공지능들 사이에 소통이 가능해지면서 그들을 생산한 인간의 상상을 넘어 다른 존재로 변신할 우려 또한 짐작해야 할 것이다.

무한하신 하느님의 창조에 기반을 둔 우주의 작은 행성 지구에서는 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새로운 사태」는 18세기 중반에서부터 19세기 초반에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사회·경제 등의 큰 변화를 겪으며 레오 13세 교황(1810~1903)이 1891년 발표한 가톨릭교회 최초의 사회회칙이자 노동헌장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던 시대에서 욕망의 부추김으로 자연을 착취하여 성장을 추구하며 이루어지는 산업화는 우리에게 늘 인간존재의 이해에 대한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한다. 과학적 지식이나 기술의 소유 자체가 ‘권력’에 중요한 접근 경로가 되는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의 사회구조에서는 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자가 사회를 관리하거나 운영·조작할 수 있다.(기획재정부 「시사경제용어사전」 참조) 

이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강조한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Technocratic Paradigm)의 해악을 기억하게 한다. 식별 없이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이는 경제 논리와 정치는 자연과 인간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찬미 받으소서」 109항 참조) 과학기술이 삶의 질을 드높여 사람의 가치를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화의 골을 더 깊어지게 한다면 여기서 잠시 멈추고 삶의 본질적 의미를 되물어야 한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 고독하게 걷는 회심의 여정을 과연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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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