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살아 계신 하느님 능력과 당신 드러내는 그분과의 만남
예수님은 부활에 관한 사두가이들의 이해에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마태 22,29)라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신다. 교리서 본문은 예수님 이전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명확하게 선포한 가르침을 제시한 이가 없었고, 예수님의 대답이 지닌 의미는 대단히 깊고 정확하다고 말한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에 상응하는 차원이고, 또 인간이 하느님 생명의 숨으로 불어넣어진 몸이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신화적 신들을 부정하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얻어진 세계관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전수했는데,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내용들이 있음을 구약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예수님께서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라며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 것이다. 즉 부활은 하느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죽음을 건너 저 세상의 일이라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논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된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전형적인 질문을 자신의 고통 앞에서 했던 욥을 만나 보자. 욥은 의인이었고 큰 죄를 범하지도 않았으며 부귀와 권세를 지녔다. 그런 그가 받은 첫 번째 시험은 자신의 소유에 관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병을 얻은 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욥은 그의 소유였던 집과 가축 그리고 귀한 자식을 잃었을 때도 동요하지 않고, 하나씩 잃을 때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라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소유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그는 병이 들었다. 이제는 소유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큰 고통은 절망을 주었고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욥 3,11-12)라며 자신의 생을 원망한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전통적 가르침에 따라 고난과 불행은 죄 때문에 당하는 형벌이니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라 말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말을 받아들이지도, 더 이상 무릎을 꿇지도 않고 하느님께 질문한다. ‘왜 입니까?’ 병으로 인한 고통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하고 또 그분만이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 입니까? 내가 죽어 어디로 간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은 욥이 스스로 질문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폭풍 속에서 거침없이 말씀하신다. “내가 땅을 세울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욥 38,4이하). 이는 ‘내가 너를 만들 때 너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는 의미다. 지혜로운 욥은 질문의 속뜻을 알아듣고 고백한다.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욥 42,5) ‘뵈었습니다(보다)’는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온몸으로 던진 질문은 존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불렀던 것이다. 불렀고, 만났고,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에서 나와 그 사랑을 향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사두가이들이 범한 오류는 성경을 자신들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언어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고,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들의 공로로 얻어진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다. 부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과 스스로 당신을 드러내는 생명이신 그분과의 만남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