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명 가까운 미사 참례자가 있었는데 그중 당시 그 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김재윤(스테파노) 형제가 미사 내내 함께 칼바람을 견디며 자리를 지켰다. 국회의원이라 미묘한 입장이었을 텐데도 그는 얼굴만 비치고 사라지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고 미사 시작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미사 후에 고마워서 다가가 인사를 하니 손이 꽁꽁 얼어있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 그는 야당의 언론정상특별위원장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일을 감당하다가 미운털이 박혀 ‘입법 로비’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누차 억울함과 무죄를 호소하였으나 재판부는 4년 형을 선고하였다.
나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몇 차례 찾아가 면회하였다. 그의 얼굴은 하늘을 우러러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맑고 청아함으로 빛났다. 나는 그의 무죄함을 의심치 않았다. 또 정권이 바뀌었으나 그는 풀려나지 않았고 2018년 8월 4년 만기를 다 채우고서야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제주에 오자마자 그는 나를 찾아왔다. 오랜 수감생활로 햇빛을 못 봐서 그런지 하얀 얼굴에 환하고 밝은 표정으로 출소 인사를 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시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것 같아 시를 많이 썼고, 이제는 시인으로 살겠다고 했다. 그런데 2021년 6월 29일 그가 갑자기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바로 그 전날 과거에 그에게 4년 형을 선고하고 문재인 정부 초대 감사원장까지 지냈던 판사가 대선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가 거짓과 불의가 버젓이 득세하는 부조리한 이 세상에 너무나 큰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항의하며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만난 정치인 중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강정은 많은 사람을 평화의 일꾼으로 키워냈다. 문정현(바르톨로메오) 신부는 1970년대부터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와 노동자들의 인권, 통일과 평화를 위해 온몸으로 싸움을 벌여온 평화의 사도다. 전국 어디서나 자본과 권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받는 작은 이들이 있는 곳에 망설이지 않고 달려가던 문정현 신부는 강정에도 어김 없이 달려왔다. 주민들이 막강한 군대와 정부를 상대로 너무나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그는 서둘러 강정에 이주했다. 일흔이 훨씬 넘은 노구를 이끌고 군사기지 건설 반대를 외치며 공사 현장 선두에서 젊은 경찰관들과 온몸을 부대끼며 농성하고 버티었다. 앉아있던 의자 채로 공중 부양으로 들려 쫓겨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바닷가에 설치된 방파제용 콘크리트 구조물 테트라포드 위에서 농성하다가 경찰과의 실랑이 과정에서 떠밀려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테트라포드 여러 개를 쌓아놓은 꼭대기에서 땅바닥까지의 거리는 10m에 가까웠으니 노인이 그 높이에서 바닥까지 추락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병원에 달려가 보니 문 신부는 의식이 또렷했고 죽다 살아났다며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검사 결과 뇌에는 아무런 출혈이 없었고, 몸 곳곳에 골절과 타박상만 관찰되었다. 천사가 받아안고 땅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고 밖에 달리 상상할 수가 없어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문정현 신부는 평소 농담 반 진담 반 내게 주교들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했다. 그러던 문 신부가 어느 날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주교관을 찾아왔다. 자신이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에 동참했다가 투옥되었으나 최근 이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고 무죄가 선고되어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강정에 땅을 조금 샀다고 했다. 강정에서 평화 운동을 계속 펼쳐가기 위해서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모이고 함께하는 보금자리가 있어야 하겠기에 서둘러 땅을 매입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땅을 확보는 하였으니 그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제주교구 주교가 추진해 달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