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 미야케는 도쿄의 국제기독교대학 3학년을 갓 마친 여학생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동남아 여러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일본군에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한 사실을 대학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서는 큰 사안으로 다루어지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모르거나 외면하는 과거였다. 엄청난 수치심과 커다란 죄책감을 느낀 에이미는 “젊은 세대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고 자문했다.
마침 대학생들의 평화 활동을 지원하는 기금이 있었다. 영국에 가서 과거 일본의 전쟁 포로들을 인터뷰하는 그의 프로젝트도 뽑혀서 100만 엔(약 900만 원)을 지원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일본이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화해를 위해 활동해 온 게이코 홈즈 여사를 제일 먼저 찾아갔다.
1948년 미에현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공부한 게이코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던 영국인과 결혼했다. 미에현의 이루카 구리 광산에서 일하다 사망한 영국군 포로 16명의 기념비를 보았던 이 부부는 뒤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게이코는 1984년 비행기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긴 애도의 시간을 보내던 중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는 영국 포로의 비석이 있던 자리가 대리석과 꽃으로 단장된 것을 보고 감동했다. 게이코 홈즈는 영국 극동 전쟁 포로의 연례행사에 참석했고 1992년 26명의 전쟁포로와 두 명의 미망인을 데리고 이루카 (현재명 아타야)의 추념식에 갔다. 일본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 사무쳤던 이들은 주민들이 가꾸어 온 기념공원을 보았고 50년이 흐른 뒤에 그들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았다. 치유의 시작이었다.
에이미는 영국인 전쟁포로와 억류 민간인, 가족 등 200명이 참석한 ‘평화와 우정’ 모임에도 갔다. 거기서 만난 20명을 영국 각지로 찾아가 인터뷰한 그는 일본으로 돌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게이코 홈즈가 만든 단체인 ‘아가페’와 함께 일본으로 화해의 순례를 하면서 일본에 대한 증오가 일본인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에이미는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물었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
사죄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고 취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일본인이 사죄해도 금방 용서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에이미는 잘 안다. 그는 상대가 용서하지 않고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는 7월 에이미는 네 명의 친구들과 다시 영국에 간다. 학생들이 인터뷰할 사람들은 10월에 일본에 오고 이들이 참석하는 ‘화해의 예배’가 도쿄의 국제기독교대학에서 열린다.
게이코를 존경하는 에이미가 영국 다음으로 한국에 와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서로 연락하기로 했다.
글 _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