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보호에 저를 맡기나이다”…순교자들 끝까지 지켰던 성모신심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단아하게 머리를 묶고 치맛자락을 끌어안은 아기예수와 함께 서있는 성모상이 순례자들을 맞는다. 남양에 성모발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성모님에 관한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양에 ‘성모성지’가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박해시기 순교자들이 지녔던 깊은 성모신심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서다.
■ 성모님을 본받으려던 신자들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서적을 통해 성모신심을 배우고 키워나갔다.
아직 조선에 선교사가 오지 않았던 시절인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경기 감영에서 하느님의 종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수색했을 당시 「매괴경」이 발견됐다. 이미 초기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묵주기도도 접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초기 교회 지도자였던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는 「주교요지」에서 성모님의 동정 잉태와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는 정약종이 이끌었던 명도회원을 비롯해 그들에게 배운 초기 신자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복자 권상연(야고보)는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했고, 여러 순교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성모님을 통해 기도했다.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파견된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명도회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정하고, 신자들에게 성모신심을 가르쳤다. 초기 신자들 사이에 성모신심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복자 윤점혜(아가타)는 기도 중 성모님 위로 성령이 내려오는 모습의 환시를 보기도 했다. 또 주문모 신부는 동정부부를 맺어주고, 동정녀들의 모임을 축복하며 지도했는데, 이들은 특별히 성모님의 동정을 본받으려하는 의지를 보였다.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다양한 신심서적을 읽고, 또 묵주기도에도 열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유박해 당시 신자들의 집안에서 압수된 물품 중에도 묵주, 성모님의 상본, 성모님에 관련된 다양한 서적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한 성모신심 확산
성 앵베르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은 성모신심을 더욱 확산시켰다.
앵베르 주교는 특히 성모신심이 돈독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조선 입국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의 착하신 예수님의 어머님의 축일인 12월 18일 밤, 사랑하올 동정녀의 보호 아래서 사고 없이 중국의 국경을 넘었다”면서 “우리는 원죄 없으신 마리아와 성스러운 천사들의 보호 아래 조선의 수도에 도착했다”고 전한다.
자신의 선교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도움으로 이뤄졌다고 여겼던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한지 1년 만인 1838년 12월 1일 조선교구의 주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로 정하고 교황청에 허가를 요청했고,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이를 승인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 신부는 성모님의 도움 아래 활동하고자 수리치골에 ‘성모성심회’를 설립했다. 성모성심회는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돼, 성모님을 공경하고 성모님의 전구로 하느님께 죄인들의 회개를 청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신심단체였다. 성모성심회를 설립한 두 선교사는 곧바로 파리 본부에 편지를 보내 조선교회 성모성심회 회원들의 명단을 보냈다. 사실 이 단체는 이미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신학생 시절에 가입했던 단체다.
성모성심회 회원들은 ‘기적의 패’를 몸에 지니고 매일 성모송을 바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치는 활동을 이어 나갔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모성심회의 활동은 적어도 병인박해가 발생한 1866년까지도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1865년과 1866년 첨례표에는 성모성심회와 관련된 날이 표기돼 있을 뿐 아니라 성모성심회 회원들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수록돼 있다.
■ 묵주기도를 바치다
박해시대 신자들은 성모님에 관한 교리를 공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묵주기도를 바쳤다.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다블뤼 주교가 교우촌 순방 때마다 “신자들을 매괴회와 성의회에 입회시키는 일을 한다”고 기록한다. 성모성심회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조선의 신자들은 매괴회 등의 신심단체를 통해서 묵주기도를 바쳐온 것이다.
1850년대 후반 신자들 사이에서 묵주기도는 가장 대중적인 기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57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작은 십자가와 성패 등을 보내주시되 묵주는 보내지 말라”며 “묵주는 조선 교우들도 아주 잘 만든다”고 전하고 묵주를 만들 때 사용하는 집게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최양업 신부가 신자들에게 묵주 만드는 법을 가르친 것은 무엇보다 묵주기도를 가르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기록에서는 묵주기도에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등장한다. 성 최형(베드로)는 묵주를 만들어 보급하는데 앞장섰고, 1869년 죽산에서 순교한 유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나서도 “묵주를 꺼내 목에 건 다음 십자고상을 앞에 모시고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