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7)] 미리내 성요셉성당 : 조선인 신부들의 활약

이승훈
입력일 2024-06-24 수정일 2024-06-26 발행일 2024-06-30 제 3399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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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강도영 신부 등 3명 사제품
초기 조선교회 신앙 정착 위해 노력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영성 돋보여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 앞에는 김대건 신부의 묘소 곁에 또 다른 신부의 묘소가 있다. 바로 김대건 신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뒤를 이어 조선인으로서 3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강도영(마르코) 신부다. 박해가 끝나고 조선인 신부들이 활동하면서 이 땅의 선교는 더욱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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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요셉성당 전경. 초대 주임 강도영 신부는 ‘성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을 조성하는 등 순교신심 전파에 앞장섰다. 사진 이승훈 기자

■ 조선 땅에서 사제품 받은 첫 신부들

병인박해로 배론의 신학교가 초토화됐지만, 선교사들은 여전히 조선인 사제 양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페낭 신학교에서, 부엉골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했고,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로는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제 양성에 매진했다. 그리고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의 결실을 처음 얻게 된 것은 1896년의 일이었다.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강도영 신부,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사제품을 줬다. 조선대목구가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국내에 설립한 신학교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교구장 주교가 서품식을 주례한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었다.

이들 3명의 신부들은 조선 땅에서 서품을 받기는 했지만, 사제로 양성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먼 여정을 떠나야 했다. 이들이 처음 입학한 신학교는 말레이시아의 페낭신학교다. 페낭신학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가 세운 국제신학교다. 당시 조선교회는 1873년부터 신학생들을 선발해 페낭신학교에 보내고 있었는데, 이들 신부들은 1882~1884년 사이에 페낭신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비록 김대건·최양업 신부처럼 중국, 필리핀 등지를 떠돈 것은 아니었지만, 유학생활은 고된 나날이었다. 특히 열대 지방 특유의 환경과 현지 음식, 풍토에 적응하는 일은 어린 신학생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유학 중 병으로 사망하는 신학생마저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조선 내에 신학교가 다시 설립되면서 신학생들은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고, 마침내 사제품을 받을 수 있었다.

김대건·최양업 신부에 이은 3번째 사제들이 서품된 다음해에는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 한기근(바오로) 신부, 김성학(알렉시오) 신부가, 1899년 3월에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가, 10월에는 홍병철(루카) 신부, 이종국(바오로) 신부가 서품됐다.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조선교회에 두 곳의 교구가 생기기 전까지 18명의 조선인 신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 조선인 신부들의 활동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이래 조선 땅의 사제는 다시 서양인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조선인 신부의 활동은 조선인 신자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신부들은 이 땅에서 신앙이 정착될 수 있도록 순교신심, 성체신심 등 다양한 신심활동을 전개했다.

김대건 신부가 묻힌 미리내에서 사목활동을 한 강도영 신부는 순교신심을 전파했다. 강 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성당,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기념 성당’을 조성해 순례자들이 김대건 신부의 영성을 만날 수 있도록 도모했다. 우리나라의 첫 성지를 개발한 것이었다.

강 신부 다음해에 서품을 받은 한기근 신부는 1925년 7월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알렸다. 또 귀국해서는 「로마 여행일기」를 작성해 신자들이 로마의 성지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책은 한국 성직자가 쓴 첫 번째 성지순례기다.

풍수원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는 1920년 풍수원성체현양대회를 열고 신자들이 성체신심을 함양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정 신부가 시작한 풍수원성체현양대회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오며 풍수원뿐 아니라 전국 여러 교구 신자들에게 성체신심을 전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 신부는 또 성부안나회를 조직해 기도와 애덕을 실천하며 신자들이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조선인 사제들은 특히 신자·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지역 사회의 가난한 삶의 자리에서 함께 살아갔다.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해성학원을 지어 교육에 힘쓰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 농법 개량에도 관심을 두고 활동했으며, 신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양잠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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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영 신부가 지역 사회 생활용수 확보를 위해 미리내 성요셉성당 옆에 설치한 ‘말구 우물’. 사진 이승훈 기자

이런 활동으로 강 신부는 지역 사회 안에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강 신부가 34년간 본당 사목을 하다 선종했을 때, 장례미사에는 신자 800여 명뿐 아니라 안성군수와 비신자 지역 주민 100여 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비신자들이 강 신부의 공덕을 기리고자 기념비를 세우려는 것을 신자들이 말렸을 정도였다.

정규하 신부도 삼위학당을 설립해 성당 사랑방에서 한글과 한문을 비롯해 수학, 역사 등을 가르쳤고, 이 학당이 이어져 광동초등학교로 발전했다.

옥천본당 초대 주임 홍병철 신부는 신자들의 가난에 직접 동참했다. 홍 신부는 성당 주변에 호박을 길러 매일 호박죽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근검절약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만여 평의 전답을 구해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