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의 현장을 찾아 황무실 성지에 들렀을 때 일이다. 기념비 속 이름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는데 차 한 대가 들어선다. 시동을 안 끈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더니 입구 곁의 방문 스탬프를 공책에 쾅 찍고는 성지 쪽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를 몰고 되나간다.
내렸다 타는 데 걸린 시간이 15초쯤? 동행인은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부부는 전국의 성지를 순례 중인 듯했다. 이 일대는 근처 솔뫼와 신리를 비롯한 여러 성지들이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어 한 차례 방문으로 여러 개의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가성비가 높은 지역이다.
이분들도 처음에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14처를 돌며 묵주기도도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순례지마다 반복되는 비슷한 순교 서사에 실감은 사라지고 감동도 무뎌져서 스탬프를 향한 열망만 남은 듯했다. 몇 개만 더 찍으면 내외가 미사 시간에 전체 교우 앞에 나가 축복장을 받을 생각에 흐뭇했을 것이다. 몇 시간을 달려와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도착한 곳에서 막상 머문 시간이 고작 15초다.
주교회의에서 발행한 성지 관련 자료집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전국에 167곳의 성지가 등재되어 있다. 처음 2011년 시작 당시 111곳이던 성지는 2016년 167곳으로 늘어났고, 연말에 나올 새 자료집에는 전국 성지의 숫자가 190곳가량으로 확대되리라고 한다. 각 교구별로 새 성지 진입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 선정에 애로가 적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성지순례를 완주해 축복장을 받은 이만 1만 명을 넘어섰다는 전언이다. 이미 완주했거나 순례길에 나선 분들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다녀야 할 성지가 많아지면서 15초짜리 순례가 더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은 된다. 순례단을 실은 버스 한 대가 도착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서로 먼저 스탬프를 찍느라 바쁘다. 기도나 설명 듣기는 뒷전이다. 하루에 여러 곳을 다녀야 해서 한곳에 오래 머물지도 못한다. 개중에는 남의 공책까지 들고 와 대신 스탬프를 찍어주는 나눔 봉사까지 한다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순교의 정신을 기리고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처음 취지와 달리 성지순례는 이제 여행사의 인기 관광 상품이 되었다. 외부 방문객의 숫자에 예민한 지자체야 관광 활성화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지원한다지만, 과연 그런가?
만들어만 놓고 찾는 이 없고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성지도 적지 않다. 사실 관계가 명확지 않아 고개가 갸웃해지는 곳도 있다. 거기서 거기인 천편일률의 성지 조성도 답답하다. 빈 무덤만 잔뜩 늘어선 풍경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과한 장식이나 설치물이 때로 보기에 괴롭다. 애초에 전국에 이런 성지가 이렇게 많을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가 든다. 집채만 한 주춧돌이 놓인 뒤 수십 년째 방치된 천진암 성지의 100년 성전 터는 볼 때마다 민망하다. 수백억을 들였다는데 사실 관계마저 의혹투성이인 김범우 성지 같은 곳도 이를 어쩌나 싶다. 진실을 얘기해도 입 다물고 외면한다. 초기의 부실한 연구와 확대 해석, 지역 교회에 대한 과도한 열정이 빚어낸 참사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