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불어넣는 기도, 다시 돌아올 거라 믿으며 열정 쏟아
주님께서 마련하신 조각가의 길
저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어릴 적 마산은 나름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로, 작은 도시지만 많은 문화 예술인들이 포진해 있었어요. 바닷가에서 수영도 하는 등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요. 먹물로 동양화를 그리는 시간이 있었어요. 난을 친다 그러죠? 붓으로 ‘쓰윽~’ 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님께서 칭찬을 엄청나게 하셨던 게 기억나요. 사생대회도 나가고는 했는데, 저는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어요. 당시 대회에 나오는 아이들은 이미 그림을 공부하던 아이들이었거든요. 하지만 만들기에서는 확연히 달랐어요. 제게는 남다른 창의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혼자서 팝업 카드를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가끔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이 너무 특별한 이상한 것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해요. 만들기에 관한 재능은 그때부터 있었나 봐요.
고등학교 졸업 무렵, 대입을 위한 진로를 정하는데, 그림보다는 뭔가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소를 선택하게 됐어요. 당시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대구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조소과에 입학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을 세워놓으신 것 같아요. 제가 날고 기어봤자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뤄진 느낌이에요. 효성여대 조소과는 제가 1회 졸업생이에요. 조소를 선택한 건 제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 저를 위한 하나의 길이 준비된 것이 아닌가 해요.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의 길로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진학하려고 했는데, 당시 효성여대에는 대학원이 없었어요. 그래서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르레상스의 발상지에서 전통 조각을 공부하고 오자는 생각이었죠. 로마에서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 전수해 주려고 애를 쓰셨어요.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했어요.
세례는 유학시절 받았어요. 당시 로마 한인 성당 예비신자들은 교황님께 세례를 받을 수 있었어요. 저도 지금은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 세례를 받았어요. 교황님께서 시성하신 한국 성인을 세례명으로요. 세례식 날 저는 무슨 할리우드 배우를 만나러 가는 느낌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갔어요. 그런데, 제 세례명을 부르면서 저를 바라보시는 교황님 눈에 푹 빠져드는 느낌이었어요. 깊고 푸른 호수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느낌이요. 아직도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차피 예술가로 살면 어딜 가나 먹고 살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영어라도 배우자는 생각으로 영국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 IMF 사태가 터졌어요. 로마에서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한국에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받았는데도, 환율이 갑자기 오르니 금액이 반토막이 난 거죠. 당시 레체에서 현재종교미술전이 열렸는데, 공모전에 참가했어요. 상금이 한 300만 원 정도였어요. 공모전에서 수상하고 상금을 받아 잠시만 머물 요량으로 한국에 왔어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집안 형편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어요. 마침 모교에 강사 자리가 나서 강의를 시작했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못 갔네요.
이곳저곳의 학교에서 시간강사를 하면서 뜨문뜨문 작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생활이 어려웠어요. 서울에 살던 유학시절 친구가 한번 놀러와서 제 작업실을 보더니 제가 안쓰러웠는지, 서울로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당시 저는 자구책으로 컴퓨터 디자인을 배웠는데, 그게 서울에서 쓰일 것 같았어요. 서울에 올라와 취업을 한 회사가 한국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당시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스테인드글라스 제조업체였어요. 조소 전공에 유학 경험도 있고, 컴퓨터 디자인도 할 수 있으니 스펙은 좋았던 거죠.
처음에는 회사와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했어요. 월급 때문에 제 예술성을 판다고 자책하면서요. 돌아보면 제게는 큰 기회였어요. 상업적 공방이지만 큰 스테인드글라스 프로젝트를 많이 수행했고,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생활을 하게 된 거니까요. 회사에 다니면서 학교 강의도 나갈 수 있었어요. 아트 디렉터로서 제 의견을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에 개진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11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저를 갈고 닦았어요.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장르를 내 안에 녹여내는 시간이었죠.
사람들에게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 전하고파
그렇게 회사에서 내공을 쌓고 독립했어요. 성당뿐만 아니라 공공시설에도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만들었죠. 보통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하면 교회를 떠올리지만 더 대중화가 되면 좋겠어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사람들을 힐링하게 하고 명상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줄 수 있거든요.
특히 성당에 작품을 봉헌할 때에는 제 열정과 기도를 쏟아부어요. 작가로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예쁘게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예쁨은 잠시예요. 작품에 쏟는 에너지와 열정에 따라 작품의 아름다움이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작품에 불어넣는 기도가 나중에 부메랑이 되어 제게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며 작품활동을 해요.
저는 신부님들이 사제 양성을 받으실 때부터 성미술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좋겠어요. 성음악 시간은 있는데, 성미술 시간은 없다고 하더라고요. 교회는 문화적 예술적 토대가 되어야 해요. 갤러리나 미술관에 가는 신자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래서 성미술 작품을 통해 신자들에게 신앙뿐만 아니라 문화의 토양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좋겠어요.
◆ 손승희(소벽 막달레나) 작가는
1968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1992년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조소과와 1997년 이탈리아 로마 국립 미술원 조소과를 졸업했으며, 2006년 이탈리아 라벤나 모자이크 아트 스쿨을 수료했다. 대구가톨릭대와 남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2011년 미국 ‘신앙과 포럼’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서울대교구 도곡동성당과 전주교구 익산 어양동성당, 부산가톨릭대 신학대학, 미국 알래스카 한인성당 등에 성미술 작품을 봉헌했으며, 현재 손승희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