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살고 있는 ㄱ은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아이의 문제로 속이 문드러지는 일은 나도 지지 않는 분야(?)여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고 함께 기도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냉소적인 신자였다. 그 무렵 나는 그녀와 함께 메주고레 성지 순례를 했었다. 기도를 바치며 십자가가 있는 산으로 올라가는데 그녀 혼자 돌연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다. 쓰러진 그녀는 몽롱해 보이는 의식 속에서 말했다.
“언니!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셨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신 거야.”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냉철했던 사람이었기에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이 중얼거림은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게 남았다. 나중에 내가 물어보니까 그녀는 그 말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후 그녀가 달라진 것은 확실했는데 그만 그 이후 딸의 엄청난 방황 앞에 마주 서게 된 것이었다. 몇 년에 걸친 그녀의 고통과 회개 그리고 가족들의 폭포수 같은 눈물들을 받아낸 후 아이는 그 힘든 방황을 극적으로 끝내고 세계 유수의 대학인 취리히 의대에 진학했다.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신앙심 깊으신 그녀의 시댁, 이런 때일수록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던 남편의 눈물겨운 기도와 사랑이 하늘에 닿은 덕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새해 인사차 온 전화에서 ㄱ은 “나쁜 소식”이야 하고 말했다. 그녀와 내가 친구가 되게 해준 다른 친구 ㄴ이 암 선고를 받고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좋은 친구였던 ㄴ과 내가 헤어진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금전 문제까지 얽혀 나는 그녀에 대해 포기하고 있었다. 미워하지 않는 것만도 내게는 힘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ㄴ으로 말하자면 좋은 남편에 여유 있는 생활, 반듯하고 열심한 신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ㄱ과 내가 아이들과 다른 이유로 고통을 받는 동안 ㄴ은 미모와 건강에 신경을 썼고 바티칸시국을 비롯한 모든 순례지를 여행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공주보다 더 우대해 주었고 공주의 친구들인 우리들까지 가끔 그 대우를 받았다.
“병 자체보다 병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ㄴ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
ㄱ이 말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ㄱ과 내가 할머니가 되도록 고통에 찌들어갈 때 ㄴ은 최첨단의 새로운 건강 보조 식품을 우리 앞에 내보이곤 했으니까.
‘인생이란 참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느끼면서 문득 나도 모르게 말했다.
“ㄱ아 우리 지난 몇 년간 많이 많이 고통스러웠던 거 그거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 보호해 주시려고 그런 거 아닐까.”
ㄱ이 의아해했다.
“우리에게 그 고통이 없었다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교만은 얼마나 자랐으며 온갖 유혹들 앞에 우리가 성히 보존되었을까. 그 고통이 있어 거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느라고 우리는 교만하지도 못했잖아. 명품백이나 건강 보조제 같은 거 신경도 못 썼잖아. 어쩌면 말이야, 어쩌면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고통의 울타리 속에서 잠시 보호해 주신 것인지도 몰라.”
강연할 때 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한다. “다 물어보세요! 저는 고통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그런 나도 고통이 다른 치명적인 유혹과 죄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처음 해보았다. 그러자 잠깐이지만 전율이 지나갔다. C. S. 루이스의 말대로 하느님은 기쁨 속에서 속삭이시고 일상 중에 말씀하시며 고통 중에 외치신다면, 어쩌면 고통 속에 헤맸던 지난 몇 년간의 ㄱ과 나는 하느님의 외침 안에서 그 우렁찬 복음과 함께 사는 축복을 그러므로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지나갔던 것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