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에 대한 전망

이승훈
입력일 2025-01-15 13:51:57 수정일 2025-01-21 13:22:11 발행일 2025-01-26 제 342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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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고 더러워진 5만 원권 지폐 한 장이 손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묻은 오물을 닦고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 은행으로 간다. 은행원은 훼손된 지폐를 받고 깨끗한 5만 원권으로 돌려준다. 어떻게 한마디의 잔소리도 찌푸림도 타박도 없이 깨끗한 돈으로 바꿔 줄 수 있을까? 그거다. 손상된 5만 원권이지만 그 가치는 5만 원이었어! 이 예를 사람으로 옮겨보자. 손상된 5만 원은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이지만 그 가치, 즉 인간의 초월적인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긴 세월 동안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보다 창세기 3장의 인간, 즉 죄, 원죄에 대해 더 강조했다. 이는 행동 결과에 집중하여 돈이 더러워지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다. 예수가 바리사이들에게 ‘한처음’으로 돌아가 너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고 한 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한처음 상태로 돌아가 그 사람의 존재를 먼저 알기를 바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는 죄성으로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있었지만,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면서 사람의 얼굴도 되찾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타락한 본성에서 구원된 본성으로 회복된 것이다. 나를 한처음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곳에서 나를 찾아야 하고 나에 대한 정의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ᅠ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완성돼야 할 부분이 우리 마음에 씨로 뿌려졌다. 어떤 씨일까? 바로 '당신의 모습'(창세 1,27 참조)이다. 시선을 바꿔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몸의 눈으로 믿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대전환이다. 매일 숨 쉬고 있는 이 생명의 숨은 애초부터 나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숨’이고(창세 2,7), 매일의 삶은 ‘일하라’(창세 1,28; 2,5 참조)는 그분의 전망 안에 있는 것이다. 내게서 당신의 숨을 거두어 가는 그날, 하느님의 자비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희망의 완성이 영광 속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교리서 2과 5항에서는 “그리고 창조의 형이상학적 상황에 필연적으로 직결된 생성, 곧 우유적 전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유적 전망’이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에겐 변하지 않는 본성적인 모습이 씨앗으로 뿌려져 있고, 씨앗은 씨앗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썩고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잠재적 수동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 모상인 ‘나’가 나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색과 머묾이 길어질 때, 우리는 앎을 더 깊이 하게 된다. 사색과 머묾의 시간은 곧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배움의 시간이 된다. 교리서 내용이 어렵다고 책장을 덮고 포기한다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보물, 진귀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나’는 묻어두고 주위만 맴돌다 간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맛있는 밥이 되기 위해선 뜸이 필요하듯 교리서의 어려운 내용에서도 그런 뜸을 들인다면, 안에서부터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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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