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는 원순수의 의미에 좀 더 깊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원순수는 원고독·원일치와 함께 사람이 누구인지 계시되는, 인간 창조에 담긴 하느님의 계획을 열어보는 결정적인 열쇠이기 때문이다. “원초적 알몸의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인간학의 첫 밑그림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학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입니다.”(교리서 11과 2항)
알몸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갓난아이와 같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지도, 결혼하고 첫날을 지낸 신랑신부가 배우자의 몸을 보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몸의 언어가 갖고 있는 더 깊은 차원을 표현한 것으로 성의 다름, 즉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호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에 가톨릭 사상의 놀라운 변화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성사 이전의 성사입니다.’ 오직 영원한 사랑(Amore)의 가시적 표지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Trittico romano, II, 3) 이는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초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다른 이를 향해 있는 존재라는 것,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하느님을 닮은 그것,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고자 하는 선(좋음)이 타자를 향해 본성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서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dono di sé)을 알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한 의식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안 것을 숨기거나 남기지 않고 주었기에 알몸이었고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므로 몸의 언어인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다’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다룬 것이다.
어떤 강압이나 다른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온전한 자유로움 안에서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음을, 내 몸은 이미 하느님의 성사임을 기억할 때, 상호 인격적 내어줌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를 선물로 주셨고, 죄성이 발견된 후(창세기 3장의 상태)에도 거두어 가지 않으셨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가, 자유는 진리 안에서 가능하다(요한 8장 참조).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다스림과 절제가 가능하고 덕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교리서에서는 알몸의 의미를 ‘자연주의적’이라기보다 ‘인격주의적’이라고 정의한다. 벗어서 알몸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입지 않은 ‘존재’, 선물의 ‘존재’이므로 하느님 앞에서 원순수의 존재와 양심이 살아나야 하는 것, 우리가 되돌아가야 하는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몸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랑이 가진 두 관점, 즉 본능과 자유, 신앙과 이성, 에로스와 아가페를 분리하지 않고 한 인간을 통합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다. 종교학자 크리스티나 트라이나는 “육신은 성사적 의미를 갖는다” 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는 순간 내 마음도 삶도 자신의 욕망에 갇힐 수 있다.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앞에서 어떤 전망을 갖기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고, 그 답은 한처음 즉 이미 나를 창조하실 때 그분의 계획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당시 사회 지도자들)에게 무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