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성당 순례

[수원교구 성당 순례] 수리산성지 고택성당

이승훈
입력일 2025-02-26 08:58:06 수정일 2025-02-26 08:58:06 발행일 2025-03-02 제 3431호 4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최양업 신부 아버지 최경환 성인 교우촌 일궜던 모습 기리며 조성
정갈한 한옥 형태 성당 건물…정겨운 분위기 속 기도하며 묵상

수리산은 안양, 군포, 안산 등의 도심과도 가깝고 좋은 경관으로 많은 등산객들이 찾는 등산명소다. 하지만 수리산은 신앙인들에게 그저 경관이 좋은 산에 그치지 않는다. 수리산(修理山). 진리를 깨닫고자 수양하는 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박해시대에 진리를 찾고, 또 진리를 따르는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모인 신앙인들을 품어준 곳이기도 하다. 그 역사를 담은 수리산성지 고택성당을 찾았다.

Second alt text
수리산성지 고택성당. 이승훈 기자

■ 산 속의 옛집

복작복작한 안양역을 지나 차로 10분가량 수리산을 향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한적한 길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배낭을 멘 등산객들이 보이니 등산로라는 느낌이 물씬 든다. 그렇게 산을 오르는 초입에 고즈넉한 옛집이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에 자리한 수리산성지 고택성당이다.

나무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듯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기둥과 흙 빛깔의 벽, 나무로 만든 문, 정갈하게 올라간 기와. 옛 정취가 묻어나는 외관이 ‘고택’이라는 이름이 참 어울린다.

‘고택’성당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이 건물 자체는 그리 오래된 건물이 아니다. 고택성당은 2006년 6월 4일에 완공하고 첫 미사를 봉헌한 건물이다. 고택성당을 고택으로 부르는 이유는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옛집의 터 자리에 최경환 성인 일가와 교우촌의 옛 모습을 기리며 다시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최경환 성인이 수리산으로 이주한 것은 1837~1838년 경으로 추정된다. 성인은 자신처럼 신앙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리산 자락을 찾은 신자들과 함께 교우촌을 이루고, 교우촌 회장으로서 신자들을 이끌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담배를 재배해 생계를 꾸려나가 수리산 교우촌은 ‘담배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성당에 들어가니 성당 내부가 독특하다. 한옥의 형태이면서도 복층으로 구성된 것도 신선한 점이지만, 무엇보다 제대가 자리한 위치가 눈길을 끈다.

성당의 평면이 긴 직사각형의 모습인 경우, 대부분 긴 양 끝에 한쪽은 입구를 한쪽은 제대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택성당은 직사각형의 좁은 끝이 아닌 넓은 면의 가운데 즈음에 제대가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인 성당은 신자들이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제대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면, 고택성당은 제대 주변에 오손도손 모여 앉는다는 인상이 들었다. 멀리 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곁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느낌이다. 아마 교우촌에서 생활하던 신자들도 이렇게 예수님 곁에 오손도손 모여 기도하지 않았을까.

Second alt text
수리산성지 고택성당 제대. 성당 가운데 배치돼 신자들이 주변에 오손도손 모여 앉아 화복한 분위기 속에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이승훈 기자
Second alt text
수리산성지 고택성당 제대 아기 예수를 안은 요셉상. 이승훈 기자

■ 아버지 최경환을 기억하며

고택성당을 들어서는 길목에는 성가정상이, 성당 제대 한쪽에는 아기 예수를 안아 든 성 요셉과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가정상은 이 고택성당이 있던 자리에서 성가정을 이뤘던 최경환 성인을 묵상하게 해줬다.

최경환 성인은 복자 이성례(마리아)의 남편이었고, 특히 한국교회의 첫 신학생으로 발탁돼 10년 이상 박해 중인 조선팔도를 걷고 또 걸으며 사목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아버지였다.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 최경환 성인의 신앙의 모범을 통해 신앙을 성숙시켜 나갔다.

최경환 성인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앙을 위해 떠나자고 제안했고, 결국 성인에게 감화돼 온 가족이 신앙을 찾아 재산과 터전을 버리고 떠났다. 한양과 여러 산골을 연명하다 수리산에 정착하게 됐다.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 떠나는 아버지를 보고 성장했다.

후에 최양업 신부는 이 사건을 두고 “프란치스코(최경환)의 가족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자진해 이런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다”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하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성인은 이후로도 늘 신앙과 교리에 관해 이야기하며 선교했고, 주변에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아갔다. 최양업 신부는 “프란치스코(최경환)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했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했다”면서, 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돼 있었다”고 기록했다.

Second alt text
수리산성지 최경환 성인 이성례 복자 묘소. 이승훈 기자

성가정을 일구고 순교로 목숨을 바친 최경환 성인의 묘소는 고택성당 맞은 편 산길을 오르면 만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른 끝에 묘소가 있다.

성인의 묘소 앞에 서니 고택성당 제대 맞은편에 창 너머로 보이던 절벽의 바위가 떠올랐다. 성인이 살던 곳을 가능한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절벽을 깎아내거나 가리지 않고 성당을 지었기에 드러나 있던 바위다.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된 성인은 40일 이상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옥사했다. 어떤 고문에도 한결같이 굳건하던 모습에 형리들은 성인을 보고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택성당에는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고 성가정을 지킨 성인이 살았고, 또 순교해 묻힌 기억이 스며있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