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위협이나 박해 앞에서 신앙은 옳고 그름 구분 세상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꿋꿋이 신앙 외치는 교회 돼야
페르가몬은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하고 아주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도시다. 여러 신들을 위한 신전이 있었고,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아탈로스 1세(아탈로스 왕조) 임금의 승리를 기념하는 여러 조각들이 산재해 있었다. 물론 소아시아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지배를 받은 이후로 황제들을 위한 예배 역시 성행했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페르가몬을 ‘사탄의 왕좌’(묵시 2,13)라고 단정해 버린다. 자비, 평화,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다소 잔잔하고 부드러운 뉘앙스를 지녀야 할 것 같은 성경의 문장들 틈에서 사탄의 왕좌라고 도시 전체를 규정하는 건, 아무래도 성급하거나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차갑고 거북한 성경의 문장들은 그래서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구약의 아모스서인데, 단죄와 심판, 그리고 질책이 가득한 문장으로 엮어진 아모스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읽혀진다. 끔찍한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모스서의 날카로운 경고성 문장들은 세상에 부득불 필요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인간들은 끝내 무너지고 넘어져야 제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페르가몬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쌍날칼’(묵시 2,12)을 지니신 사람의 아들이다. 날카로운 쌍날칼은 요한묵시록에서 그리스도의 복수를 가리키는 표징이다. 요한묵시록 19장에서 백마 탄 기사로 묘사되는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장군이요, 승리자다. ‘하느님의 말씀’(묵시 19,13)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리스도는 날카로운 칼을 입으로 뿜어내며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묵시 19,16)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도의 복수는 대립할 경쟁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권능을 지닌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 계신다면, 그곳이 사탄의 왕좌 또는 다른 무엇이 있든, 주눅 들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를 주님이요 임금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에게 세상의 모든 곳은 주님을 증거하는 자리일 뿐이다. 페르가몬에는 안티파스(묵시 2,13)라는 증거자가 있었다. 안티파스에 관한 기록은 5세기 카이사리아의 안드레아에 의해 처음 나타난다.
도미시아누스 황제 통치 시절(81~96년) 페르가몬의 주교로, 우상숭배를 거부하다가 불에 달구어진 청동황소상 안에서 죽어간 순교자가 안티파스라고 전해진다.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는 안티파스의 순교를 보고서도 신앙공동체는 물러서지 않았고 제 믿음을 지켰다고 말한다. 쌍날칼을 지닌 사람의 아들을 믿는다는 건, 제 신념과 정체성이 세상의 어떤 논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결심과 실천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렇다면, 페르가몬에 보내진 편지를 읽는다는 건, 교회와 세상, 혹은 믿음과 불신의 대립 구도에 의한 이원론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다. 마침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나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묵시 2,14) 세상도 아니고 불신도 아닌, 신앙을 끝끝내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고 이미 인정한 ‘너’(페르가몬교회)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는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 당혹스럽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 이유가 드러난다. “너에게는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이 있다.”(묵시 2,14) 다른 이방 종교나 문화, 혹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믿는 이들 내부에 믿음의 가치와 무관하거나 해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라암은 구약의 예언자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모압 임금 발락의 청에 맞서 이스라엘을 축복해준 예언자였다.(민수기 22-24장 참조) 그러나 발라암이 축복한 이스라엘은 ‘프오로’에서 모압 여자들과 즐겼고 우상숭배를 자행했다.(민수 25,1-3) 하느님과의 계약을 모조리 거부한 이스라엘이었다.(신명 31,16) 발라암의 축복과 이스라엘의 일탈은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행태가 어떠하든 하느님의 백성이란 이유로 무작정 축복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초대교회는 발라암의 이야기를 통해 곧은 정체성을 지니지 않는 신앙의 ‘적당한 타협’이나 ‘무한 긍정’, 혹은 ‘원칙 없는 관대함‘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우상과 황제숭배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적당한 개방과 환대의 수준에서 처리해버리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또한 다짐하면서 말이다.(1베드 4,2-4)
세상의 위협이나 박해 앞에 신앙은 피아식별이 쉬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히 구별해 낸다. 그러나 교회 내부의 문제에 눈을 돌리면 그 식별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세심한 관찰 없이는 교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신앙의 왜곡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신앙이 ‘인자함’이나 ‘중용’의 미덕으로만 꾸며질 때 그렇다.
신앙인은 착하고 부드럽고 온유해야 한다고 말하는 근거로 ‘사랑의 예수님’을 찾지만, 세속과 타협하고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이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일어날 때, ‘쌍날칼의 예수님’을 외면하는 것이 신앙이 되어선 안 된다.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건, 비겁한 타협이 될 수 있고, 말해야 할 바조차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면서 사랑, 정의, 평화를 거론하는 건 허망한 일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게 실은 비겁한 타협이 연속일 때가 많고, 그것으로 우리는 후회와 성찰을 연거푸 살아내는지 모를 일이다. 결국 페르가몬은, 아니 우리 믿는 이는 회개해야 한다.(묵시 2,16) 숨겨진 만나를 먹고 흰 돌도 찾아 ‘새 이름’을 얻어야 한다. 탈출기에 나타나는 ‘만나’를 두고 랍비 엘리아자르는 이렇게 해석한다.
“이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가올 세상에서 너희들은 만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만나를 ‘숨겨진 만나’로 칭하면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찬례로 이해했다. ‘숨겨진’이란 그리스말 형용사를 ‘간직한’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특별히 유보된 만나는 다름 아닌 예수님 그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는 예수님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쌍날칼’의 예수님을 향하는 건 이러저러한 세상 논리에 휩쓸린 교회가 되지 않길, 그래서 할 말은 하는 교회이길, 행여 교회 조직의 견고함을 위하여 정치인과 경제인 앞에 적당히 타협하고 할 말을 잃(잊)어 가는 교회가 되지 않길 외치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리하여 승리를 상징하는 흰 돌을 세상 마지막까지 간직하는 교회이면 좋겠다. 세상 속 홀로 신앙을 외치는 동시에 세상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 어렵고 무거운 일이다. 우리는 그 힘든 일, 무거운 일을 해내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