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사순 제5주일

방준식
입력일 2025-03-31 13:38:37 수정일 2025-03-31 13:38:37 발행일 2025-04-06 제 3436호 1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제1독서 이사 43,16-21 / 제2독서 필리 3,8-14 / 복음 요한 8,1-11
Second alt text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어느 누가 “나는 죄가 없소”라고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의 부족함을 안고 주님 앞에 서야 하는 존재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우리 서로 안아 줄 수 있는 관대함을 하늘에 청해 봅니다. 인스타그램 @baeyounggil

오늘 복음에서 유다교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잡을 정교한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바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하나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그 주위에 손에 돌을 들고 둘러선 채 간음한 이를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신명 22,21)을 실행해야 할지를 묻는 것입니다.

방금 현장에서 잡혔기에 여인의 죄는 재판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체 없이 답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해 놓은 덫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요한 8,6)

당시 유다에서 사형권은 오직 로마 황제의 대리자인 유다 총독에게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법에 따르더라도 간음의 형벌은 사형이 아니었기에 율법을 따르라 하면 로마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일이 되고, 그 여인을 놓아주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로마 황제나 유다 백성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두 선택 가운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평소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언행을 생각할 때 아마 그분께서는 여인의 죽음을 바라시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로마적이던 사두가이들과 달리 로마에 저항하는 성향을 보였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율법을 따라 로마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 죄인을 풀어주어 백성의 신망을 잃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내심 그렇게 바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간음 현장에서 여인을 잡았으면 간음 상대인 남자도 있었을 터인데(레위 20,10에 따르면, 그 또한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는 그냥 두고 굳이 연약한 여인만을 끌고 온 것도 예수님의 연민을 자극해 자신들이 원하는 선택을 유도하려는 속셈에서였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수님의 심란한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로 해석하고, 다른 이들은 로마의 재판관이 형을 선고하기 전에 먼저 기록하는 것에 비교합니다.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물어 투석형으로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땅에 쓰셨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두 번째 해석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사실 성경은 죄인의 이름은 땅에 새겨지고(예레 17,13), 의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된다고 합니다.(루카 10,20)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 혹은 살리라 말하는 대신 죄 없는 자 그를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돌을 놓고 물러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희는 과연 죄가 없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 또한 죄인들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을 때 심판하는 대신에 참아주고,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있는 자신들에게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고 돌을 내려놓고 물러갔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지만, 예수님은 자비를 위해 정의를 포기하시거나 반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즉, 죄를 모른척하시거나 정당화하지도 않으시고, 죄인에게서 회개의 기회마저 빼앗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은 자비로서 정의를 구현하십니다.

우리 모두도 죄인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회초리 앞에서 마지못해하는 자백이 아니라, 주님의 따스한 시선에 이끌리는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이 사순 시기에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더 자비로워질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자비를 입었으니,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Second alt text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