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느님 공부

수비아코

이주연
입력일 2025-05-07 09:13:26 수정일 2025-05-07 09:13:26 발행일 2025-05-11 제 3441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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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 집을 짓고 살기로 마음 먹었을 때,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렘은 내 정원과 내 텃밭을 가꾸며 사는 것이었고, 두려움은 고립과 어둠 때문이었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이탈리아 수비아코다.

수비아코. 베네딕토 성인이 로마로 유학을 왔다가, 당시 로마의 타락과 세속화, 부패, 이민족들의 방탕한 분위기에 환멸을 느끼고 혼자 떠난 곳이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이 대목을 설명할 때, ‘평양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베네딕토가 서울로 공부하러 왔다가 환멸을 느끼고 하느님을 찾아 강원도 정선의 어느 동굴로 떠났다’ 쯤으로 설명한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신부님께 여쭈어보니 대충 비슷하다고 하셨다. 나는 오래도록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에 하느님 공부를 하러 왔던 베네딕토는 왜 그리로 갔을까. 아름답고 웅장한 성당들이 제일 많은 곳이 로마인데. 누가 ‘하느님이 많이 계신 곳(?) 이 어디지’ 하고 물으면, 세상 천지에 로마가 그 대답이 아닌가 말이다. 젊은 날의 나였다면 유럽 문화 재건협의회나 기독교 문화 되살리기 운동 본부 같은 데 가입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십여 년 전 나도 수비아코로 갔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73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수도원기행2」에도 썼지만, 그곳은 산세가 만만치 않아 가는 길이 약간 험했다. 지금도 그러할진대, 베네딕토 성인이 살았던 당시는 어떨까 싶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몬테 카시노를 보고 오는 길이라, ‘굳이 가야 할까’ 생각도 있었다. 게다가 가을 저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녁은 빨리 내렸고, 수비아코는 스산했다. 나는 베네딕토 성인이 살았던 동굴을 돌아보며 그 어둠을 상상했다. 지금 방문해도 어둡고 춥고 스산한 곳, 베네딕토는 대체 왜?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내가 산골로 가기로 마음먹고 집이 완성되었을 때 폭풍우 치거나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밤, 나는 베네딕토를 생각했다. 그 어두운 동굴 속에서 혼자 시편을 외우며 하느님을 만나려고 기도하는 그를 …. 신기하게도 그러면 이 어둠이 두렵지 않았고 비바람 치는 밤이 안온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 같지만 내 주변의 개신교인들을 바라보며 ‘대체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뭐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인 성녀가 안 계시니 그렇구나’ 싶었던 것이다. 비바람 치는 산골에서 나는 수비아코의 베네딕토를 생각한다. 교회에 실망할 때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생각한다. 죽음이 두려울 때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늙음과 쇠약을 두려워할 때는 성 프란치스코를 …. 그들은 가까운 곳에 사는 우리의 맏형 누나들같이 구체적인 등불이 되어 주신다. 늘 생각하지만, 인간은 밥 한 그릇 때문에 동료를 적에게 밀고할 수도 있고, ‘안 믿겠다’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그리하지 않겠다며 목숨을 내놓는 엄청난 존재이다. 우리 안의 그 엄청난 신성을 늘 일깨워 주시는 성인 성녀가 계심에 오늘도 감사한다.

참 그리하여 1500년 후 베네딕토 성인은 유럽 문화의 수호자로 선포된다. 무슨 무슨 운동 본부에 가입하지 않고도 결국 로마를 타락으로부터 지켜내고 마는 것이다. 이 무슨 기발하고 멋진 결과란 말일까. 지난밤 이곳은 비바람이 거셌다. 나는 시편 127편을 읽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일찍 일어남도 늦게 자리에 듦도 … 헛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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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