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리운 분… 당신의 87년 삶 뒤따라 걸어봅니다
6월 6일 탄생 100주년 맞아
생애 흔적 남은 6곳 순례
하느님께 헌신한 삶 돌아봐
유년시절 보낸 군위에는 공원
대구 등 사목지엔 역사관 있어
용인공원 묘소에도 발길 이어져
한국교회와 사회를 환히 비춰주던 등불,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오는 6월 6일(음력 5월 8일)은 김 추기경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 추기경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히 김 추기경을 기념하는 공간을 찾아보면 어떨까. 유년시기를 거쳐 사제로, 주교로, 추기경으로 살아오다 선종하기까지, 김 추기경의 생애를 기념하는 공간을 순례하며 김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기억해본다.
■ 신앙과 인간됨의 요람 -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경북 군위군 군위읍 군위금성로 270
공원 상시개방.
기념관: 09~18시(동절기 09~17시, 12~13시 점심시간)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김수환 추기경이 아홉 살 소년이던 어느 날, 김 추기경의 어머니 서중하(마르티나) 여사는 김 추기경과 형 김동한(가롤로) 신부에게 ‘신부가 되라’고 했다. 자신을 사제의 길로 부른 첫 음성을 듣던 순간 김 추기경은 경북 군위 용대리에 있었다. 현재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원장 최광득 토마스 신부)이 있는 자리다.
추모기념관, 경당, 추모정원, 잔디광장, 십자가의 길, 평화의 숲 등 다양하게 조성된 공원이지만, 그중 단연 돋보이는 곳은 김 추기경의 옛집이다. 생가는 김 추기경이 살았던 1920~1930년대의 모습으로 재현돼 있다.
방 두 칸의 자그마한 초가집. 여기엔 김 추기경 신앙의 뿌리가 있다. 김 추기경의 아버지 김영석(요셉)은 부친을 순교로 여의고 옹기 굽는 마을을 떠돌며 살아오다, 이곳 용대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간신히 마련한 이 작은 집마저도 공소로 내놓으며 신앙생활을 했다. 김 추기경은 이 집에서 밤마다 1~2시간씩 기도하는 어머니 곁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어머니의 기도를 따라 중얼거리곤 했다. 후에 김 추기경은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교육을 배운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김 추기경하면 떠오르는 ‘옹기’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다. 어린 김 추기경은 이곳에서 옹기 굽는 부모님을 돕곤 했다. 생가뿐 아니라 생가 앞쪽에 자리한 옹기가마에서, 또 추모기념관 앞 광장에 늘어선 옹기들에서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그려볼 수 있다.
공원은 김 추기경 유년시절의 장소지만, 김 추기경의 생애를 회상하고 사랑 나눔 활동에도 동참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김 추기경 기념관은 김 추기경의 삶의 여정을 옹기를 빚는 과정에 접목해 인상적이다.
■ 성직을 향한 길에 오르다 - 성유스티노신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관
대구 중구 명륜로12길 47
09~17시(동절기 10~17시)
성소, 하느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김 추기경이 성직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은 그중에서도 파란만장했다. 가출, 꾀병, 징병, 도주, 전쟁…. 도무지 성소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 단어들이 사제품을 받기까지 김 추기경이 겪은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길의 첫걸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성 유스티노 신학교’, 현 ‘성유스티노신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관’이다. 기념관에는 1933년 성유스티노신학교 예비과에 입학해 2년을 수료한 김 추기경을 기억하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군위에서 대구까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김 추기경은 걷고 또 걸었다. 50㎞도 넘는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은 큰 형에 대한 반항심으로 홧김에 나온 가출이었다. 김 추기경은 대구에 있는 누나 집을 방문한 어머니를 만날 요량으로 가출했지만, 결국 그대로 신학교로 입학하게 됐다. 아침밥을 얻어먹지 못해 나온 가출길이 졸지에 우리와 많은 이를 위해 ‘밥’이 돼준 성직의 길이 됐다.
사제보다는 장사에 뜻이 있었던 김 추기경은 교칙 위반이나 꾀병 등으로 신학교에서 퇴출당할 기회를 노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서 공베르(Antonie Gombert) 신부, 장면 박사, 일본 유학 중 게페르트(Theodor Geppert) 신부 등 은사들을 만나고, 일제에 학도병으로 징병됐다가 전쟁 속에서 도주하는 등 숱한 사건들을 겪으며 사제의 길에 올라서게 된다.
■ 교회와 세상으로 나아가다- 대구대교구 주교좌계산성당 역사관, 가톨릭신문 역사관
대구시 중구 서성로 10
10~18시(월요일 휴무)
대구시 중구 서성로 20 매일빌딩 5층
10~17시(토·일 및 공휴일 휴무)
“주님, 사실 저는 다른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길은 보여주지 않으시고 오로지 이 길만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195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대구 주교좌계산성당. 제대 앞에 엎드린 김 추기경이 하느님께 속삭인 기도다. 굴곡진 신학생 시절이었지만, 김 추기경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끊임없이 찾았고 순명으로 응답했다. 떠밀리듯 시작한 성소였지만, 김 추기경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로 “신부가 된 것”을 꼽곤 했다.
김 추기경이 사제품을 받은 이곳 주교좌계산성당은 2016년 역사관을 마련, 김 추기경의 유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사제품을 받은 이 성당 바로 옆에 김 추기경이 사제 생활 중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시기로 떠올리는 장소가 있다. 김 추기경은 “가톨릭신문 사장시절은 내 일생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기”라며 “신문을 위해서는 식사시간도 아까울 만큼 열과 성을 다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사 대구본사에 자리한 가톨릭신문 역사관에는 가톨릭신문의 역사에도 큰 획을 그은 김 추기경의 활동을 소개하는 자료가 전시돼 있다.
독일에서 그리스도교 사회학을 배운 김 추기경은 사장이자 영업사원이자 기자로서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해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올바로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공의회 소식 보도에 사명감을 갖고 임했다. 아울러 김 추기경은 교도소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고, 행려병자와 장애인을 자주 찾아 도왔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 사랑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해야지 왜 머뭇거리고 있는가.’
사장을 역임하며 이런 고민이 깊어갈 무렵 주한교황대사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가 김 추기경을 불렀다.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 사도들의 후계자로- 성지여자고등학교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완월남로 20
토·일 및 공휴일 개방(사전 문의시 평일 낮 순례가능)
“우리 교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한 쇄신 정신과 사목 정신을 최선을 다해 신부들과 수도자, 신자들의 협동 하에 구현시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요청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빛 아래 깊이 반성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1966년 5월 3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 교정. 주교 서품식과 착좌식을 마치고 마산교구장이 된 김 추기경은 취임사에서 자신의 사목 방향을 밝혔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최전선에서 알리던 그가 이제 공의회 정신을 가장 주도적으로 구현하는 자리에 선 것이다. 김 추기경은 성지여고 교정에 있던 사제관을 주교관으로 삼고 교구 사목에 나섰다.
김 추기경은 후에 이 시기를 떠올리면서 “한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기초를 놓아야 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면서 “세상 한가운데 있음에도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공의회 정신을 구현하려는 김 추기경의 노력은 교구의 초석을 놓는 데도 바탕이 됐지만, 세계주교단의 마음을 돌리는 역할도 했다. 마산교구장 시절인 1967년 세계주교시노드에 참석한 김 추기경은 가톨릭 신자와 타종교 신자의 결혼인 ‘혼종혼’을 반대하는 세계주교시노드의 흐름을 단 한 번의 발언으로 뒤집었다. 8분30초의 짧은 발언이었지만, 성경뿐 아니라 「사목헌장」, 「교회헌장」 등 공의회 문헌을 적절하게 인용해 세계주교단의 주목을 받았다.
김 추기경은 “한국인들은 「교회헌장」 16장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기 탓 없이 복음과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해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속한다”면서 “다른 종교 신자와의 결혼을 교회법으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좀 더 사목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시절 밤을 새워 공의회 문헌을 번역하고, 핵심 부분을 제목으로 뽑던 김 추기경이었기에 공의회 문헌의 주요 부분을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 한국교회 첫 추기경이 걸어간 길-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길 74
“제가 하는 말을 정부 당국에 전해주십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김 추기경은 1987년 6월 늦은 밤 은밀히 찾아온 정부 고위당국자에게 말했다. 아마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기억하고, 김 추기경과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아는 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다. 6·10민주항쟁이 일어나자 항쟁에 참여한 수많은 학생들이 경찰의 진압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숨어들었다. 김 추기경의 이 발언 뒤 마침내 정부는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고 경찰을 철수시켰다.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다. 명동성당이 성지가 된 것은 다름 아닌 김 추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동성당은 김 추기경이 만들어간 ‘세상 속 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김 추기경은 훗날 “고위인사에게 그렇게 말은 해놓았지만 결과는 장담하지 못했다”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하느님 앞에 앉아 기도했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을 곁에서 본 이들은 김 추기경이 늘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김 추기경의 행보는 민주화에만 있지 않았다.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곳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변해줬고, 참사가 일어날 때면 아파하는 이들의 편에 서있었다. 그리고 사회에 큰 이슈가 생길 때마다 교회만이 아니라 온 국민에게 올바른 길을 찾는 이정표를 제시해줬다. 김 추기경은 그 모든 순간 치열하게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고뇌하고, 기도했다.
서울대교구청 2층 로비에는 김 추기경이 앉던 주교좌가 전시돼 있다.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날 한 말을 그가 1998년 퇴임할 때까지 한 결같이 지켰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천주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 하느님 품에 잠들다- 천주교 용인공원묘원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로 154-62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 성직자묘역에 자리한 김 추기경의 묘비에 시편 23장 1절이 적혀있다. 김 추기경은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12분 향년 87세로 선종했다. 묘소 근처에 놓인 꽃들과 편지들이 선종한 지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줬다.
“저는 이제야 추기경님께서 저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절실히 깨닫습니다.”
묘비 곁 누군가 김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전 생애를 바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온 김 추기경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을 넘어선 ‘사랑’이었다. 그리고 김 추기경은 선종하기 전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기를 당부했다.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