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쉽게 따라 부르며 주요교리 익히도록 도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악기 요청하며 음악 통한 신앙 교육·신앙심 고취 도모 당시 유행하던 곡조 차용한 천주가사 교리의 토착화 시도한 사례로 평가
글로만 보던 복음말씀에 선율을 덧붙이면 더욱 각인이 쉽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 따르면 ‘교회는 가톨릭 종교음악이 기도를 감미롭게 표현하거나 일치를 초래하며, 거룩한 의식을 더욱 성대하게 감싸 줌은 물론,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그 목적을 정의하고 있다. 세 차례의 가혹한 박해를 겪고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시기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최양업. 하지만 내부적으로 분열된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 낸 것은 함께 부를 수 있는 천주가사였다. 완전한 성가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교리와 신앙을 소리 내어 부르는 방식을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히 다질 수 있었다. 잦은 박해로 신앙을 숨겨야 했던 조선시대 신자들에게 교회 음악이 어떻게 전파되고 쓰였는지 살펴본다.
■ 서양 음악 수용의 선구자, 최양업 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보낸 편지에 따르면 최양업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양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하나 보내주십시오”라고 적는다. 줄곧 성물이나 성화를 보내달라고 적었던 최양업이 악기를 요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1838~1839년 마카오에서 신학생 시절을 보냈던 최양업은 당시 스승인 칼르리 신부에게 성가와 서양음악을 배웠다. 당시 반주로 사용된 프랑스의 손풍금을 처음 접한 최양업은 조선에 돌아와 신자들에게 음악을 통해 신앙을 전할 목적으로 악기를 요청한 것으로 추측된다. 최양업이 사목활동을 했던 1850년대 이전에는 조선 교회에 이렇다 할 교회 음악이 없었다. 최필선의 「초기 한국 가톨릭 교회음악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천주가사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779년 주어사강학(走漁寺講學) 이후다.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참가한 토의 자리에서 십계명과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천주가사는 곡조 없이 글을 읽는 형태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이 조선 땅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면서 천주가사 확산은 활기를 띄게 된다. 최필선은 논문에서 “당시 천주가사는 전승민요 가락으로 노래됐고 리듬이 자유롭고 가창자의 감흥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렸다”며 “민중들의 일상생활 리듬에서 반영됐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민중의 노래로 보편화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양업이 쓴 천주가사는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한글, 즉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구어로 풀었기에 글을 모르는 여성들도 이해하기 쉬운 형태였다. 또한 민요나 독경(讀經)과 같은 음영(吟詠)이었기에 토착화가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최양업은 당시 유행하던 주변 노래의 곡조를 천주가사에 차용했고, 신자들에게는 가사 안에 담겨 있는 교리를 읊으며 외우도록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자신의 음악적 소양과 신자들의 상황을 고려해서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