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 마당] 하느님께 받은 선물을 나누는 것

박효주
입력일 2024-04-01 수정일 2024-04-02 발행일 2024-04-07 제 338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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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처럼 잘하지 못하는데 계속 악기 봉사를 해도 될까?’

유치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는 청주로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바이올린 배우는 아이들을 보고 ‘나중에 내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꼭 시키고 싶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바이올린을 낑깡거리며 시작했고, 중학교 때부턴 본당의 작은 행사들에서 구색을 맞추는 역할 정도로 바이올린 연주 봉사를 했다.

보통은 환영도 받고 보람도 있었다. 하지만 전문 연주가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를 볼 때면 주눅이 들기 일쑤였고, 어려운 기교가 나오는 악보를 켜지 못할 때마다 좌절하고는 했다. ‘왜 나에겐 하느님께서 큰 탈렌트를 주지 않으셨을까’ 심통도 났다. 바이올린 악기를 들고 다니기만 해도 엄청난 실력자로 보는 눈길 때문에 더욱 부담도 됐다. 하지만 어디선가 ‘바이올린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안 할 수가 없었다. 안 하면 성경에 나오는 탈렌트를 묻어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망한 마음으로 바이올린 봉사를 한 지도 어느덧 20년쯤 됐을 때였다. 어느 날 성당에서 평범하게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특송으로 바이올린 연주가 흘러나왔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악기 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특별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연주를 듣는 사람들도 이런 기분일까?’

이날부터 나는 바이올린을 ‘잘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가톨릭 성가나 모차르트 미사 음악 정도만이라도 듣기 좋게 연주한다면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지금 본당에서는 이사를 가자마자 성가대를 찾아가 적극적으로 바이올린 봉사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새 성당 신축을 추진 중이어서 작은 가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본당이었기에 더욱 힘이 되어드리고 싶었다.

현재는 한 달에 두 번 토요일 저녁 미사와 성탄·부활·성모의 밤 등 행사가 있을 때 봉사를 하고 있다. 신부님들께서 신경 써주셔서 미사 때 박수도 받고, “오늘 연주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맞죠? 잘 들었습니다”라는 신자분들의 관심의 말을 들을 때면 바쁜 일상을 쪼개 봉사하는 데 대한 큰 위안이 된다.

또 집 인근 병원의 준본당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고 있는데, 환자분들의 쾌유에 대한 염원을 담아 연주하다 보니 더욱 보람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잘함’의 끝은 없었다. 어느 수준에 도달해도 세계적, 역사적으로 보면 더 잘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가장 뛰어나신 하느님도 계시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보고 ‘왜 저것밖에 못 하나’하고 비웃으실까?

‘잘함’에 집착했던 예전에는 예민하게 들렸던 불협화음이나, 나와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도 거의 무뎌졌다. 특히 봉사에 있어서는 더욱, 잘하는 것보다 정성과 하느님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생겼다. 성가대처럼 보여지는 실력이 우선시 되는 단체에서는 이 때문에 갈등이 생기곤 하는데 음악적 완성도보다 조금 더 사랑이라는 본질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공통 감사송 4 : 찬미는 하느님의 은사’ 중)

글 _ 박 아녜스(수원교구 서부본당)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