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일치 주간 특집] 수원, 순례하며 일치를 위해 기도하다

이승훈
입력일 2025-01-13 15:20:11 수정일 2025-01-14 13:45:18 발행일 2025-01-19 제 342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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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동성당·수원종로교회, 옛 토포청 자리 순교터 가치 함께 지켜
교동 대한성공회 수원교회, 전례·성당 등 천주교회와 닮아 있어

수원 화성이 자리한 행궁동과 교동은 수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 역사 안에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도 자리하고 있다. 1월 18~25일 일치 주간을 맞아 수원에 복음의 씨앗을 퍼뜨려온 여러 그리스도교들의 자취들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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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원도호부 토포청 자리에 들어선 북수동성당. 이승훈 기자

■ 순교의 피가 뿌려진 곳

수원 시내에서 가장 먼저 본당이 자리 잡은 곳은 어딜까. 지금은 수원 시내에 번화한 곳이 많지만, 복음이 전해질 당시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았던 곳은 역시 종로였다. 종로는 팔달문과 장안문을 잇는 길로, 수원 화성이 축조될 당시 서울의 종로를 본 따 만든 거리다. 수원의 첫 본당은 이 거리에,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42에 자리하고 있다. 바로 북수동본당이다.

수원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퍼진 것은 순교의 역사와 맥을 함께한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수원 화성 일대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잃었다.

순교의 중심이 된 곳이 수원도호부의 토포청이었다. 토포청은 죄인들을 심문하고 형을 집행하던 기관이다. 수원도호부는 경기도 화성시 동부 일대와 수원시, 오산시 등을 관할한 지방 행정 구역으로, 수원도호부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은 토포청으로 끌려와 고문을 받았고, 처형장으로 끌려가거나 옥사 등으로 이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했다.

기록에 남아있는 순교자만도 80여 명이고, 기록에도 남지 못하고 처형된 무명 순교자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 박해가 얼마나 혹독했는지, 박해가 끝나고 종교의 자유가 찾아온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무당짓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주학쟁이만은 되지 말라”는 말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북수동본당이 위치한 곳이 많은 순교자들이 붙잡히고 또 순교했던 토포청이 있던 자리다. 1906년 이 자리에 있던 기와집을 사들여 내부를 개조해 성당을 만들었고, 1923년 르메르 신부가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승격됐다. 북수동본당은 순교터이자 수원 시내의 첫 본당인 것이다. 그렇기에 교구는 2000년 9월 북수동성당과 여러 순교터를 품은 수원 화성을 성지로 선포했고, 많은 순례자들이 성지를 순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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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수동성당 인근 수원종로교회 역시 순교터 위에 세워졌다. 이승훈 기자

■ 순교터를 함께 지켜온 수원종로교회

천주교회로서 가장 먼저 수원 시내에 자리를 잡은 본당이 북수동본당이라면, 개신교회로서 가장 먼저 수원 시내에 자리를 잡은 교회는 수원종로교회다.

수원종로교회는 북수동성당과 이웃한 교회다. 성당에서 팔달문 방면으로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북수동본당 성당의 일부가 토포청 자리이듯 수원종로교회 예배당 역시 수원도호부의 토포청 자리다. 1901년 설립된 수원종로교회는 북수동(보시동) 115번지에서 1907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이 자리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의미 있을까. 교회를 안내하는 인쇄물을 보고 의문이 풀렸다. 안내문에는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던 순교의 터, 성지에 주님의 몸된 수원종로교회가 세워졌다”는 설명이 게재돼 있었다.

수원종로교회 강성률 담임목사는 “1969년 현재 교회 건물을 지을 당시 수원도시개발에 따라 교회 건물을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순교의 터로 의미 있는 이 자리를 지켜나가자고 뜻을 모았다”면서 “종단은 다르지만 한 분이신 주님을 섬기는 교회”라고 말했다.

많은 개신교회들이 성경 봉독과 설교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기독교대한감리회에 속한 수원종로교회는 성찬예배도 중요하게 여긴다. 성찬예배는 천주교의 미사처럼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함께하는 예배다. 비록 천주교의 미사처럼 성사로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몸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마음은 같다. 수원종로교회는 월 1회 성찬예배를 실시, 이날의 봉헌금은 모두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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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수원교회 성스데반성당. 이승훈 기자

■ 교동에 자리한 대한성공회 수원교회

북수동본당과 수원종로교회가 자리한 북수동뿐 아니라 북수동 인근에 자리한 교동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가 많다. 북수동이 조선시대 수원의 중심지였다면, 교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수원의 중심지였다. 그러다 보니 ‘수원교회’라고 불리는 곳들이 많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수원교회는 1928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수원교회는 1946년, 기독교한국침례회 수원중앙교회는 1951년부터 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해왔다. 교단은 다르지만 모두 그리스도교기에 ‘수원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여러 수원교회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교동의 ‘수원교회’들 중에서도 1904년 설립돼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한성공회 수원교회다.

다른 개신교단에 비해 옛 전례를 많이 지켜온 대한성공회는 많은 모습이 천주교회와 비슷하다. 성당의 모습이나 신부님이라는 호칭도 그렇고, 전례력에 따른 생활도 친근하다. 비록 성사교류는 불가능하지만, 감사성찬례의 모습은 꼭 천주교회의 미사를 닮았다.

특히 대한성공회 수원교회의 경우 매일 오전 7시 성당에서 우리의 시간전례 ‘성무일도’에 해당하는 성무일과를 함께 바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또 성공회 신자뿐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성당에 들어올 수 있도록 울타리를 허물고 성당의 일부 공간을 공원처럼 꾸미기도 했다. 수원교회만이 아니었다. 수원중앙교회도, 북수동성당도 예수님을,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열려있는 곳으로, 누구나 기도할 수 있도록 성당문을, 예배당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대한성공회 수원교회 보좌 김대묵(가브리엘) 신부는 “이곳 신자들만 가는 곳 아닐까, 들어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성당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면서 많은 이들이 성당에 머물며 기도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