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박효주
입력일 2025-01-15 13:39:40 수정일 2025-01-21 12:57:14 발행일 2025-01-26 제 342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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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에서는 신탁을 받은 보소르의 아들 발라암을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거짓 예언자로 고발한다. 얼핏 보면 성령의 감도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를 잡신을 숭배한 이방인의 점쟁이로 낙인찍은 것일까? 그가 대낮의 술잔치를 기쁨으로 삼고 성적 타락과 물질과 명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발라암, 그는 칼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미래를 알아 이를 준비해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는 삶의 안전이 보장될 때야 비로소 자기 초월의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인간 실존의 갈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신뢰다. 절대자에 대한 신뢰,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신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 즉 건건한 자기 존중감은 강력한 힘을 지닌다. 신뢰가 무너질 때 혹은 형성되지 않았을 때 다른 것에 눈을 돌려 외부에서 힘을 빌려와 나를 그 힘에 맡기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존재하려 한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기에 금세 무너질 허상이다.

신뢰와 위기는 같은 선상에 있다. 위기 앞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며 치고 나가는가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미래에 대한 불안 앞에서 느껴지는 두려움과 어둠의 기류를 넘어설 수만 있다면 우리 삶은 새로운 깊이를 더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좌절과 혼란 앞에서 현대인은 손안에 있는 기기를 이용해 쉽게 오늘의 운세를 클릭할 수 있는 조건에 살고 있다. 영국 시사 주간 ‘이코노미스트’까지 한국 점술 시장(사주·타로·운세 등) 규모를 37억 달러(4조1569억 원)에 달한다고 보고하는 바처럼 운세 앱의 규모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신동아 2019.12. 참조)

이런 세상을 극명하게 반영해 주는 것이 요즘 우리나라 정치계의 어두운 국면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을 위한 정치는 역사를 바탕으로 다각적 측면에서 고도의 전문가들이 신중하고 심도 있고 무엇보다도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국민이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이뤄져야만 한다. 자신의 명예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영달을 위해 국민의 혈세를 받아 흥청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국민에게는 매 순간 생존이 달렸다. 그것을 손쉽게 점서에 의존해 국제적으로도 복잡한 이념과 이권이 얽힌 우리나라를 정치하려 들지 말라. 자신이 판단할 수 없고 대화할 수 없으면 멈추고 하야하길 권한다. 발품을 팔아 길거리에서 한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비참함을 살피는 정치인을 국민은 간절히 원한다. 어떻게 점괘에 기대어 치정할 수 있는가. 그런 정치가들에 의해 다스려질 백성들이 아니다. 만민을 위한 정치철학으로 긴 사유 끝에 양심에서 울려 나오는 판단에서 나온 선택이 아닌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는 한 미래는 없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보고 느끼시는 분이시다.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116항) 그 끝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불안감이 일어 누군가에게 결정권을 내어주고픈 위기 앞에서 먼저 ‘나는 누구인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이 이지러질 테니까. 중요한 선택은 점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고뇌라는 대가를 치르며 고통을 통과해야만 삶이 참다울 수 있다. 위기의 때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주는 아름다운 사슬, 묵주를 손에 들자. 성모님께 기대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강생,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시는 고뇌, 부활의 빛을 통과하자. 그때 비로소 ‘희망의 순례자’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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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