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집회 27,4-7 / 제2독서 1코린 15,54-58 / 복음 루카 6,39-45
명심보감 천리편(天理篇)에는 종두득두(種豆得豆), 곧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맥락의 말이 나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는 말씀과 상통하는 속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 이어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도 가르치십니다. 이를 ‘종두득두’ 속담에 적용해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도 조금 다르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콩이 좀 더 긍정적으로, 팥은 부정적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물론 콩과 팥은 둘 다 콩과 식물로서 콩은 대두(大豆), 팥은 소두(小豆)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콩과 팥은 실제로 이런 어감을 담은 식물이라 흥미로운데요. 그 배경은 다음과 같아 보입니다.
콩은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 일컬어질 만큼 단백질이 풍부합니다. 지방도 풍부해서 콩으로 기름도 짜고, 장도 담급니다. 그에 비해 팥은 탄수화물 식품으로, 단백질은 콩의 절반 정도만 들어 있습니다. 팥으로 장을 담그는 경우는 있지만, 밀가루를 섞어야만 끈기가 생기고 발효도 잘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팥 껍질은 콩보다 단단합니다. 콩은 여섯 시간 정도만 물에 불리면 물러지지만, 팥은 스물네 시간 불려야 약간 부풀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콩이 좋은 이미지로 등장하는 「콩쥐팥쥐」 이야기가 생긴 듯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차이는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는 나무가 주로 매개로 등장하는데요. 이는 예부터 나무가 왕조·왕국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상도 나무입니다. 포도나무가 대표적 예입니다. 시편 80장 9절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써서 이집트 탈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5장 1절에서 2절에는 이런 신탁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나무로 심으셨는데, 백성이 들포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성경의 말씀은 종두득두 속담과 비슷하지만, 깊이나 초점에서 조금 다른 가르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콩 심은 데서 콩만 나오는 차원을 넘어 열매의 우수성까지 다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가르침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강조한 요한 세례자의 꾸짖음(마태 3,8-9)과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 포도나무는 옛 이스라엘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과실수입니다. 하지만 열매가 딱딱하고 시큼하게 변해버리면 그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집니다.(예레 2,21; 에제 15장 등) 이런 ‘들포도’ 신탁은 백성이 죄를 지어 징벌을 앞둔 시기에 자주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이 있지요? 이 속담처럼 우리는 습관처럼 죄를 지으며 그 때문에 곤경에 처하지만, 성경에서는 구원의 역사도 반복함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징벌 예고에 들포도의 비유가 쓰이듯이, 백성이 죄를 용서받는 시대에는 예언자들이 같은 모티프를 써서 회복을 선포합니다. 예레미야서 31장 4절에서 5절에서는 사마리아에 포도가 다시 자라리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고합니다.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에는 제2 이사야(이사야서 40장 이후를 전달한 무명 예언자)가 집을 짓고 포도원을 가꾸게 되리라는 신탁을 전달하여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고합니다.(이사 65,21) 곧 옹기장이가 합당한 그릇이 만들어질 때까지 진흙을 뭉치고 빚는 작업을 계속하듯이(예레 18,1-12), 하느님도 이스라엘과 세상 만민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뜻입니다.(이사 64,7: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참조)
옹기장이가 진흙 작업을 계속해 마침내 좋은 그릇으로 빚어내듯, 하느님께서는 옛 이스라엘에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예레 6,27; 말라 3,1-3), 지금은 불같은 당신의 말씀을 제련사처럼 주시어 우리를 단련하십니다.(예레 9,6ㄴ; 즈카 13,9)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당신 말씀까지 본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쁜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처럼, 우리 공동체의 흥망도 우리의 행동과 말에 내재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팔자 우리가 꼬지 않도록’ 세상이 아무리 수상하게 돌아가도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어지럽히며 여기저기서 만들어내는 속임수 논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