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망 있는 신흥 은행가, 재야(在野)의 천재 건축가를 알아보다
역사 이래 유례없는 대이교(大離敎) 사태에 직면한 교회는 파리 대학에서 제안한 세 가지 해결 방안, 곧 자발적으로 사임하거나, 재판을 통해서 해결하거나, 공의회를 통해서 교황을 선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은 자발적 사임이나 중재 재판 등을 거부하였으며 계속해서 두 곳에서 후계자들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러자 공의회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결국 두 교황에 거슬러 13명의 추기경이 1409년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피사 공의회(공의회로 인정 안 됨)에는 교회가 당면한 이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400여 명의 주교, 주교 대리, 수도원장, 대학의 대표들이 참석하였고, 회의장 분위기는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공의회는 먼저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과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교황의 소송을 진행하여 폐위를 선언하였고, 이어서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교회에는 세 명의 교황, 정확히는 한 명의 교황과 두 명의 대립 교황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이 사망하고 요한 23세 교황이* 선출되면서, 피사의 교황도 후계자를 잇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은 발타사레 코사라는 나폴리 사람으로 비리가 있어서 평판이 안 좋은 추기경이었는데, 사람을 끄는 매력과 탁월한 수완으로 교황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문제 해결 없이 점점 더 안 좋은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 요한 23세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개회를 선언했지만 정통 교황이 되지 못하고 폐위되었습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성 요한 23세 교황(안젤로 주세페 론칼리)은 교회 역사의 이러한 아픔을 잘 알고 있었기에, ‘요한 23세’를 자신의 교황명으로 선택함으로써 교회를 쇄신하고 현대화(aggiornamento)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독일 왕 지기스문트(1410-1437 재위)는 요한 23세 교황을 압박하여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를 열었습니다. 공의회는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을 자발적으로 용퇴하게 하였고,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은 폐위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며, 끝까지 저항하는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 교황 역시 폐위하였습니다. 그리고 1417년 마르티노 5세 교황(1417-1431 재위)을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교회의 대이교는 40년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로 대이교 막 내려
은행업으로 부와 권력 축적한 조반니
새 교황과 폐위된 교황 화해 이끌어
브루넬리스키의 천재성에 주목하며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 건축 맡겨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태어난 1377년은 시에나의 성 가타리나가 아비뇽에 있는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에게 로마로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썼던 해이고, 바로 다음 해인 1378년부터 1417년까지 교회 안에 이런 대이교가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인 1401년 브루넬레스키가 산 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 공모에서 공동 당선되었을 때, 오만하게도 이를 거부하고 로마로 떠난 그를 지켜본 한 위원이 있었습니다. 우연히도 대이교가 끝난 1417년 마흔 살의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돌아와 피렌체에 정착했을 때 그는 청동문 공모전 때보다 훨씬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피렌체의 건설 위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1419년 피렌체 당국이 유럽 최초의 사회복지시설의 건축을 계획했을 때, 그는 그 시설을 가장 잘 구현할 건축가로 브루넬레스키를 지목하고 그에게 피렌체 고아원(Ospedale degli Innocenti)의 설계를 맡겼습니다. 지저분한 옷차림에 성격은 까다롭고 강한 자존심에 오만하기까지 한 거부감투성이인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을 알아본 그 사람은, 1421년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뽑히기도 한, 치밀하고 조심스러우며 속마음을 쉬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은 완벽하게 이루어내는 당대의 신흥 은행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입니다.
1340년 피렌체 대성당의 공사가 중단된 큰 원인 중의 하나가 피렌체의 바르디 가문과 페루치 가문 등 주요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이 모두 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피렌체에는 소규모의 가족 은행들만 남았습니다. 사촌이 운영하는 작은 은행의 직원인 조반니 데 메디치는 실력을 인정받아 로마 지점장이 되었고, 1397년 사촌이 은퇴하자 로마 지점을 인수하고, 이어서 피렌체에 은행을 열었습니다. 조반니는 성공 후에도 평범한 집에서 살았고, 매일 메디치 은행까지 상점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행동은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사람들 사이로 길을 내며 출근하는 다른 가문들의 행색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조반니가 그렇게 은행가로 성공하고 명망을 얻기 시작할 즈음, 후에 피사의 요한 23세 교황이 될 나폴리 출신의 코사 추기경은 조반니를 설득하여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립 교황이 되자 이에 격분한 나폴리 왕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평화 조약을 빌미로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조반니 데 메디치는 돌려받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에게 돈을 대부하였습니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폐위된 요한 23세 교황이 지기스문트 왕에게 구금되었을 때, 조반니는 교황의 석방금을 내주고 피렌체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으며, 죽은 후에 산 조반니 세례당에 묻어 주었습니다.
조반니의 이런 행보는 은행의 자금 사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지만, 메디치 은행은 고객의 어떤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지원해 주며, 그만큼 재정 상황도 안정적인 신용 있는 은행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후 새롭 뽑힌 마르티노 5세 교황이 로마로 가기 전에 피렌체에 머물렀을 때 조반니는 새 교황과 폐위된 교황이 화해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에 마르티노 5세 교황은 조반니에게 감사를 표하였고, 몇 년 후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모든 계좌를 관리하는 은행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가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로 돌아온 때이고, 조반니는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인 브루넬레스키에게 피렌체 고아원뿐만 아니라 메디치가와 인연이 있는 산 로렌초 성당의 공사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1429년 조반니 데 메디치는 장남 코시모와 막내 로렌초에게 ‘가난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라. 가능한 시뇨리아에 가지 말고, 송사에 휘말리지 말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남 코시모는 메디치가의 신조와도 같은 아버지의 유언을 마음에 담고, 이제 자신 앞에 펼쳐질 시대를 당당히 맞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