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16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금남면 두만리 일대, 미군 보병 제24사단 19연대는 금강방어선을 뚫고 내려온 북한군 제3사단을 힘겹게 저지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처참하게 기록된 전투 중 하나다. 금남면은 6·25전쟁 당시 남으로 뻗어가는 ‘1번 국도’가 지나가는 곳이어서 금남면 일원을 방어하느냐, 내주느냐는 전쟁 전체의 향배를 좌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패배하고 만다.
펠홀터 신부가 자신에게 주어진 양떼를 끝까지 돌보다 북한군이 쏜 소련제 소총을 맞고 숨을 거둔 것도 이날이다. 미군 측 영문자료에서 펠홀터 신부 최후의 순간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금남면향토지」는 ‘펠홀터 군목’이라고 신분 표기에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역 행정기관이 지역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공적 기록이라는 측면에서는 정확도가 높은 사료다. 국내외 사료를 토대로 펠홀터 신부가 걸어 간 순교자적 행적을 선명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1950년 7월 16일 미군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대오가 흐트러졌고, 심각한 부상병 약 30명을 포함해 100여 명의 미군들은 금남면 용담리 야산(영문 자료에는 ‘on a mountain above the village of Tuman’)으로 이동했다. 미군 지휘관은 부상병들을 옮기던 군인들이 탈진해 부상병들을 데리고는 더 이상 이동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부상병 30명 곁에는 펠홀터 신부와 군의관 린턴 J. 버트리(Linton J. Buttrey) 대위만이 남게 됐다. 펠홀터 신부는 증원군이 도착하면 부상병들과 함께 이동하겠다고 생각했다.
오후 9시경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해가 진 지 1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아 어둠이 깔리기 전이고 무척 맑은 날씨인 데다 반딧불이가 많아 시야는 밝았다.
기다리던 미군이 아니라 북한군이었다. 북한군임을 인식한 펠홀터 신부는 군의관 버트리 대위에게 피신할 것을 다급하게 요청했다. 버트리 대위는 피신 도중 발목에 총상을 입긴 했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총구가 펠홀터 신부를 향했을 때 펠홀터 신부는 무릎을 꿇은 채 부상병들에게 병자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했고 등과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무기를 지니지 않았던 펠홀터 신부 군복에는 군종신부를 상징하는 십자 마크가 붙어 있었다. 펠홀터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은 부상병들도 이 때 한꺼번에 전사한다.
군의관 버트리 대위는 6·25전쟁 정전(1953년 7월 27일) 후 미국 상원 ‘한국전쟁 학살 소위원회’(Subcommittee on Korean War Atrocities)가 실시한 청문회에 참석해 펠홀터 신부의 죽음을 증언한다. 1954년 1월 11일 발간된 청문보고서에 기록된 미국 미시간주 찰스 E. 포터(Charles E. Potter) 상원의원과 군의관 버트리 대위의 청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포터 의원: 그(펠홀터 신부)는 흰색 십자가로 군종신부 신분을 드러내고 있었습니까?
-버트리 대위: 네. 그렇습니다. 펠홀터 신부는 흰색 십자가 표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포터 의원: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버트리 대위: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포터 의원: 그는 죽임을 당할 때 어떤 일을 하고 있었습니까?
-버트리 대위: 부상병들에게 병자성사(last rites, extreme unction)를 집전하고 있었습니다.
▲포터 의원: 적은 펠홀터 신부를 어떻게 죽였습니까?
-버트리 대위: 그는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