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을 향한 가엾은 마음, 눈물로 눌러 쓰다 신학생 시절부터 선종 전까지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 담겨 박해 피해 교우촌 찾아다니며 밤새 성사 주던 모습도 기록돼 고통받는 신자들 염려하는 비통한 심정 절절히 느껴져 조정의 부패상 날카롭게 비판 백성들의 애환에도 통감해
‘우리 교회의 국보급 유물’.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서한을 판독하고 국내로 들여오는 데 큰 기여를 한 고(故) 최승룡 신부가 최양업 신부 서한을 평가한 말이다.
최양업 신부가 남긴 서한은 그의 생애와 사목활동, 신심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1차 사료일 뿐만 아니라 박해시기 교회 상황과 조선 정치현실까지 알려 주는 귀중한 사료다. 샤를르 달레 신부도 「한국천주교회사」를 쓰면서 최양업 신부 서한을 자주 인용했다. 이렇듯 최양업 신부의 활동, 신앙과 영성이 온전히 표현돼 있는 서한을 살펴본다. ■ 최양업 신부 서한 알기 최양업 신부 서한은 기존에 19통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편, 2009년)에도 서한 19통이 실려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된 서한은 모두 21통이다. 2012년 서울대교구 고(故) 최승룡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에 방문해 최양업 신부 서한 2통 원본을 직접 확인하고 복사한 사본을 입수했다. 새로 발견된 서한 2통은 「교회와 역사」 2013년 8월호에 라틴어 원문 전문과 우리말 번역문(번역 김상균 신부) 및 해제(방상근 박사)가 실리면서 빛을 보게 됐다. 서한 21통의 작성 시기는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 신분이던 1842년 4월 26일부터 선종 전해인 1860년 9월 3일까지다. 서한은 모두 유창한 라틴어로 작성됐고 발신 장소는 마카오, 심양, 홍콩, 상해 등 국외가 6통, 도앙골과 절골, 소리웃, 안곡 등 국내가 14통, 장소 미상이 1통이다. 서한 수신자는 기존 19통 중 14통이 르그레즈와 신부, 4통이 리브와 신부, 1통은 두 신부 공동이다. 2013년 새로이 발견된 2통은 베롤 주교에게 보낸 것이다. 수신자 모두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이다. 현재 기존 19통 가운데 발신 장소를 알 수 없는 1통을 제외한 18통은 파리 외방 전교회가 1997년 6월 23일 한국교회에 기증했고 같은 해 7월 1일 한국으로 전달돼 서울대교구 절두산순교성지에 영구히 보존하게 됐다. 2013년 새롭게 공개된 서한 2통 사본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최양업 신부 서한의 가치에 대해 “사료적으로는 성 김대건 신부 서한보다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다”며 “선교 열정으로 온 몸을 불살랐던 젊은 사제의 신심과 기도지향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정갈한 라틴어 필체에서 모범적인 신학생의 모습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로 “최양업 신부님이 조선교회 신자들에게 한글로 쓴 서한도 있을 듯한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은 아쉽다”고 밝혔다.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