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옹기장수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돌보았으나 수환이 8살 때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옹기와 포목 행상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이 시기에 옹기굴 옆에 있던 옛집을 주일이면 공소로 사용할 수 있게 내주었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신앙을 첫 자리에 두었던 가정에서 형 김동한(가롤로, 1919~1983)이 사제성소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학생이 되었다.
이어서 동생 수환도 자연스럽게 사제성소에 응답하여 신학교에 들어갔다. 1945년 사제서품을 받은 형 신부는 대구대교구의 여러 본당을 거쳐 군종 사제로 사목했다. 후에 한국 가톨릭 결핵 시설 연합회를 조직하고 대구 결핵요양원 원장으로 사목하며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품어주었다.
‘사랑과 나눔 공원’에서는 김 추기경의 삶과 신앙을 살펴보면서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다. 얕은 산비탈에 자리 잡은 공원에는 기념관과 경당, 추모정원과 추모벽, 옛집과 옹기 가마, 평화의 숲과 십자가의 길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 기념관은 반원형으로 건립되었는데 옹기와 관련된 주제(빚다. 질박하다. 견디다. 품다. 비우다. 숨 쉬다)로 전시실을 나누었다. 이곳에는 김 추기경의 생애와 신앙과 관련된 유물, 사진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 가운데서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쓴 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기념관 입구 외벽에는 방문자들이 전시물을 보고 느낀 소감을 적어 걸은 바보나무가 있다. ‘바보’는 추기경이 자화상을 그린 후 아래에 적은 “바보야”에서 따왔다. 기념관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김 추기경의 삶처럼 소박하고 단순한 형태의 스테파노 경당이 있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후 3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사랑과 나눔 공원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 옛집이다. 방 두 칸에 부엌이 있는 작은 초가집인데, 각 방에 걸린 김 추기경 사진이 애잔한 느낌을 준다. 특히 옛집 툇마루에 앉아 깊은 상념에 젖어있는 사진을 보면 더욱 그렇다. 어린 수환은 이곳에서 옹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를 기다렸고, 후에는 옹기와 포목을 팔아 가족을 부양했던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매일 기다렸을 것이다.
옛집 아래에는 옹기를 굽던 가마와 우물가가 재현되어 있다. 혹독한 박해를 피해 산 속에 들어가 독을 구우며 살았던 김 추기경의 집안과 신앙 선조들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그분의 호가 ‘옹기’인 이유도 다시 알 수 있다.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옹기는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유용한 생활 용기였다. 쌀을 담으면 쌀독, 김치를 담으면 김칫독이 되었다.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이다.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김 추기경은 세상에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옛집 뒤편의 87개 계단(김 추기경의 나이 상징)을 올라가면 양팔을 벌리고 공원 전체를 축복해주는 예수성심상이 있다. 계단 곳곳에는 김 추기경의 주요 사건을 알려주는 부조물이 설치되어 올라가면서 그분의 생애를 묵상할 수 있다. 또한 동산의 고불고불한 길에는 십자가의 길 14처(정미연 작가 작품)가 설치되어 있어서 성상을 보며 기도할 수 있다.
사랑과 나눔 공원 주변에는 추모정원과 다양한 옹기, 김 추기경 도자 벽화와 말씀, 흉상과 마리아상, 천사상이 있다. 공원 조형물 사이에는 영산홍과 황매화, 꽃잔디가 만발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사랑과 나눔 공원은 대구대교구가 군위군으로부터 위탁 받아 운영하는 순례지다.
공원을 거닐며 기도를 바치고 다시 옛집으로 내려가 툇마루에 앉았다. 1993년 이 자리에 앉았던 김 추기경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어느새 태양이 지면서 서쪽 하늘과 ‘사랑과 나눔 공원’도 물들이고 있었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는 것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떠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물들인다.
“나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모습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다.”(김수환 추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