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의 덕목>
“세속화와 성직자 중심주의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다. 대답이 명료함은 자의식에 대한 이해가 투명하고 성찰과 번뇌의 시간이 농익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세속화와 권위주의는 사제의 생활과 교회 운영 방식의 문제에 이른다. 오늘날처럼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추락되고 시민사회로부터 빈정거림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량적 분위기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건 결국 ‘나로부터의 혁명!’ 외에 대안은 없다. 출발점을 찾는 것은, 신학교 입학 면접 때나 서품면담 때에 받던 원천적 질문, 즉 사제로서의 삶의 목표 앞에 자신을 세워야 가능하다.
“사제, 수도자의 덕목은 무엇입니까?”
‘체 게바라’는 혁명가의 덕목에 대해 “사랑이지요. 혁명의 목표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투쟁과 혁명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답을 얻는다. ‘사제, 수도자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역시 사제로서의 삶의 이유와 목표가 뚜렷하면 대답 또한 명료할 것이다.
개신교 젊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동시성’(同時性, Synchroneity)이라 한다. “진실로 예수를 믿는다 함은 2000년 전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 온전히 결합된 모습”이라는 의미다. 여성신학자 이은선 교수는 수행에 대해 ‘聖-誠-性’ 이라는 표음 언어로 말하길, “육신적 욕망의 인간 본성(性)에서 출발하여 지극한 의지(誠)를 통하여 ‘거룩함’(聖化)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다. 목표 정향이 분명한 의지의 삶이 ‘성화에의 길’이다.
■ 생태계적 토대 위에 사는 사제직
우리 모두는 좋은 사제들이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태어나고 성장한 가정의 자녀이며, 교양인이자 민주시민이고, 지성인이고 종교인이며, 예수의 제자인 그리스도교 신자다. 그리고 공동체로부터 선발된 사제다.
사제는 위로 올라갈수록 소수인 계단형의 위쪽에서 살아간다. 이건 계급이 아니라 ‘생태계적 토대’다. 토대의 위에 있는 자는 죽어도 먼저 죽고, 도망가도 마지막에 뛰게 되는 관계성을 이룬다. 멍에는 가볍지만 두려움은 크고 의무감은 무겁다. 맨 위쪽이 그리스도라면 사제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토대를 위해 헌신하는 섬김의 자리에 위치한다. “신부이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말은 토대 위에 존재하는 생태적 관계성을 지적하는 말이다.
■ ‘공감능력’과 ‘자기성찰능력’
덕행의 본질과 핵심은 공감 능력이다. 공감은 다른 개체가 ‘하나의 몸’으로 느껴지는 ‘동시성’의 감정이다. 공감은 최고의 영적 정화의 상태다. 공감의 힘이 있어서 사랑, 사람이 된다. 성찬례는 최후 만찬의 기억과 회상으로 주님 현존을 만나게 하는 ‘공감의 성사’다.
공감은 마음과 영(靈)의 형상 활동이다. 공감 순간에 하느님의 영이 임재한다. 딸은 어머니의 김장김치에서 부모의 노동, 땀과 수고를 공감한다. 영성체는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의 눈물을 먹고 마시는 공감과 현존의 순간이다. 미사예물을 받은 사제가 눈앞의 제물에서 영적 공감을 못한다면 제병과 포도주가 어떻게 2000년 전 주님의 성체성혈이라 선포할 수 있는가? 그건 기만이다.
사제는 자기 삶의 태도에 대해 살필 줄 아는 양심과 도덕의 담지자다. 넘어질 수 있지만 무엇에 걸렸는지 보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 성찰 능력은 신앙의 수행, 성장과 성화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용서와 화해의 힘이다.
※ 박기호 신부는 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로, 1991년 사제품을 받고 1998년 ‘예수살이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2006년부터 충북 단양 ‘산 위의 마을’에서 기도와 노동, 공생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