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현(崔昌顯), 최인길(崔仁吉), 김종교(金宗敎) 등 중인계급은 물론 정약전·약종·약용 형제 등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며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 소식은 유림(儒林)의 귀에 들어가 거센 반발을 사게 된다. 천주교 교리가 당시 국가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림들은 이벽을 토론으로 설득해 천주교 전파를 그만둘 것을 종용하려 했지만 이벽의 논리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섰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곧 시련이 다가왔다. 1785년 김범우(金範禹, 토마스)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다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한 것이다.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해 하던 유림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통문을 돌리면서 “천주교인들과 완전히 절교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이벽의 부모는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나섰다. 심지어 아버지는 목을 매 자살하려고까지 했다. 3개월에 걸쳐 문중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상을 생각해보자면 당연했던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벽은 가족에 의해 자택 감금돼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고 살 수밖에 없었다. 부모가 격노했다면 자식들은 며칠씩이나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당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에 열중하며 명상하던 그는 178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벽의 말년 신앙에 대해 파리외방전교회 달레(Dallet)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단순히 배교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아쉬운 점은 남달리 짧았던 생애와 박해였기 때문에 유작(遺作)이 부족해 그의 사상적인 가치를 평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은 이승훈의 유고집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수록된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성교요지’(聖敎要旨) 등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벽은 서학을 접하면서 신의 존재, 원죄, 영혼불멸, 사후세계 등 사상 폭을 넓힘으로써 유교와 천주교 사상을 접목시켜 한국 천주교가 꽃필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특히 이벽의 사상체계와 지식은 18세기 조선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에게 전달되고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 선구자였다. 이벽 이전에도 천주교를 접한 사람은 많았지만 주자학에 대해 심한 반발을 느낀 학자들이 서학을 유용한 학문으로 받아들여 연구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학자들은 종교를 이단시했다. 이벽이 세례를 받고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한 1784년을 한국교회가 한국 천주교 창설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