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지혜 11,22-12,2) 제2독서(2테살 1,11-2,2) 복음(루카 19,1-10)
위령성월, 만나고 헤어진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도록 마주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도 싶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과 첫 대면을 가졌던 자캐오를 생각하며 문득 삶 안에서 인연을 맺은 하고 많은 관계가 떠오릅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움을 담아 진한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오늘 지혜서의 말씀을 묵상하는데 자꾸 신명기 구절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24)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 된다.”(신명 21,22-23)라며 시신을 함부로 대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구절이 마음에 맴돌았습니다. 비록 하느님께 저주를 받아 세상을 마감한 사람의 시신일지라도, 죽을죄를 지어서 백번 죽어 마땅한 죄인의 몸이라 하더라도 주님께는 혐오스럽지 않고 싫지도 않다는 뜻이라 새겨졌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라는 지혜서의 고백에 아멘이라 화답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물론 이것은 인간의 모든 죽음 앞에서 몸가짐을 경건히 하라는 가르침일 터입니다. 동시에 그런 불쌍한 삶을 살지 않도록 스스로의 삶을 살펴 살아가라는 경고이기도 할 테지요. 성경은 그 이유가 주님께서 주신 땅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조처임을 곁들여 밝히는데요(23절 참조). 주님께는 주검마저 이렇게 소중할진데, 숨을 쉬고 살아가는 우리 몸은 얼마나 귀하게 여기실지 어림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몸은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신 귀하고 귀한 하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이 계시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몸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한 고귀한 육체를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물드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오늘 자캐오에게 다가가시듯 세상의 모든 이에게 다가가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어드리며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청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 깨우쳐주시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나시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당신의 제자인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이제 세상을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신앙생활은 성당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겠습니다. 미사를 통해서 하늘의 힘을 얻어 세상에 파견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야 할 의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은 세상에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파견된 하늘 시민의 긍지를 잃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이 넘쳐나는 시대라고 합니다. 손안에 쥔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는 일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모두 외롭답니다. 누구와도 통하지 않는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답니다. 그럴듯한 겉모습으로 공허감을 감추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저 눈만 뜨면 세상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곁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에 현혹되어 집중하느라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진정한 관계가 아닌 소유의 극대화를 위하여 자신의 삶을 소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 세상 핑계를 합니다. 달라진 세상 탓이라는 토를 답니다. 명백한 잘못이요 타락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야말로 오직 자신의 소유를 극대화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려 했던 카인의 비루한 방식인 까닭일 뿐이니까요. 삶을 사랑의 관계로 꾸려가라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한 행태일 뿐이니까요. 이기고 군림하려 드는 마음에는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못하십니다. 소유에만 골몰하여 타인과의 관계를 손익으로 따지는 피폐한 삶을 영위한다면 주님이 계시지 않는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카인처럼 하느님을 떠나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창세 4,12)로 전락하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그럭저럭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살아가니 어찌해야 할까요?장재봉 신부rn(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