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유지와 정치적 목적 달성 위해 조건 걸고 ‘종교 자유’ 제안한 대원군 태도 바꿔 선교사·신자 대규모 처형…1866년 조선 전역 휩쓴 병인박해
남양성모성지는 오늘날 성모성지로 더 유명하지만, 남양이 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이유는 성모신심 고양을 위서만은 아니다. 남양성모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됐던 순교지다. 남양성모성지는 순교자들의 성모신심만이 아니라 박해 사상 유래없이 큰 규모로, 또 가혹하게 진행돼 ‘대박해’라고도 불리는 병인박해를 기억하는 공간이다.
■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접촉
1864년 1월 철종이 사망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고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였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조 대비는 흥선군을 대원군으로 세워 국정을 위임했다.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이 집권 세력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천주교에 관한 인식이 변해 입교하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박해를 주도하던 당파가 권력을 쥐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대원군이 조선의 선교사를 찾았다. 당시 러시아는 1860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하고 조약을 체결하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대가로 시베리아 동부를 차지하게 됐다. 그렇게 두만강을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되자, 러시아가 조선에 국교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대원군은 러시아의 요구를 물리치기 위한 방안으로 프랑스 개입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성 베르뇌 주교의 1864년 8월 18일자 서한을 보면 대원군은 베르뇌 주교와 안면이 있는 관장에게 “만약 러시아 사람들을 쫓아낼 수만 있다면 종교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러시아 사람들과는 종교가 달라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답했다. 베르뇌 주교의 거절에도 대원군은 한 번 더 베르뇌 주교에게 접촉했다. 러시아의 요구가 계속됐기 때문이었다.
이러는 사이 조선교회의 지도급 신자들 사이에서도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항하는 방법이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일이며, 조선에 와 있는 서양 주교들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편지를 대원군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성 남종삼(요한)은 서한을 작성해 직접 대원군에게 전달했는데, 대원군은 좌의정 김병학과 의논한 후 남종삼을 불러 과연 베르뇌 주교가 러시아인들을 막을 수 있는지 확인한 후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종교의 자유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에 기뻐했다. 신자들은 대원군과 주교들의 면담이 성사될 수 있도록, 주교들이 서울에 올 수 있도록 보필했고, 1866년 1월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서울에 도착했다. 주교들은 서울에 머물면서 면담을 기다렸지만, 면담은 이뤄지지 않았고 2월 19일에는 성 최형(베드로), 이어 2월 23일에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다.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 병인박해의 시작
면담까지 생각했던 대원군의 태도 전환에 관해 샤를르 달레 신부는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지고 조정 대신들의 압력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단 선교사를 만나고자 염두에 둘 만큼 골칫거리였던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사라지면서, 대원군은 굳이 서양 선교사를 만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와중에 1866년 1월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처형하고 있다는 조선 사신의 보고가 도착했고, 이에 대신들이 서양인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대신들의 의견을 따랐고, 병인박해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잡혀 들어가기 시작했고, 특히 서양 선교사들이 표적이 됐다.
서울에 있던 베르뇌 주교와 성 브르트니에르 신부가 체포됐고, 경기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성 볼리외 신부와 성 도리 신부가 붙잡혔다. 그리고 충청도 제천 배론신학교를 운영하던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잡혔다. 이렇게 체포된 선교사와 신자들 중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는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3월 9일 최형과 전장운이 순교했는데, 그 다음날 조 대비는 ‘사교(邪敎)를 금지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조 대비는 교서에서 “단속하고 특별히 더 체포해 기어코 모두 소탕한 뒤에 그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만약 숨겨두고 조사에서 발각됐을 경우에는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베어 죽여야 할 것이며, 사람들도 역시 다 같이 그를 처단하게 될 것”이라고 강경한 박해 의지를 내비쳤다.
박해령이 내리고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와 신자들의 처형이 이뤄졌고, 충청도에서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됐다. 포졸들이 다른 선교사들이 숨어있는 곳을 재촉하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이 쓸데없이 약탈과 고문을 당할 것을 염려해 성 위앵 신부를 불렀고, 다블뤼 주교의 심부름꾼과 포졸을 만난 위앵 신부도 붙잡혔다. 성 오메트르 신부도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생각에 자수했다.
불과 2달 사이에 당시 한국교회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순교했다. 나머지 선교사들은 가까스로 조선을 빠져나가 중국으로 향했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신자들의 괴로움을 염려했던 선교사들의 바람처럼 박해는 소강상태가 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박해는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