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336)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들었을 텐데 (2)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6-05-25 09:50:45 수정일 2016-05-25 14:26:14 발행일 2016-05-29 제 2996호 1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순례의 책임자인 나만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순례를 하던 40분의 신자들 앞에서 순례의 목적지를 잃어버렸을 때의 당황스러운 상황과 부끄러움! 암튼 사태를 빨리 수습한 뒤, 그곳 성지 안내소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도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를 매우 잘 아시는 봉사자의 안내를 받게 되었습니다. 산속에서 20분 정도를 기다렸더니, 안내 봉사자 한 분이 씩씩하게 걸어 우리 쪽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기쁘게 환영을 했고, 그분에게 여정을 맡겼습니다.

안내 봉사자만을 믿고 또 다시 산길을 한참 걷는데, 나와야 할 목적지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봉사자 분은 그 지역 순례지를 손바닥 보듯이 잘 아시는 분인데, 그분마저 길을 잃은 듯한 분위기가 감지되었습니다. 안내 봉사자 분은 이 사태를 수습하시고자, 우리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산속 목적지를 찾아 날아(?)가셨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아무리 기다려도 봉사자 분은 오지 않고,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힘들어도 원래 목적지를 찾아가느냐, 아니면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가느냐! 결정에 앞서 나는 순례 오신 분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쳐다보았는데, 순간, 마음속으로 뜨거운 느낌이 들면서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아, 이번 순례는 비록 일정은 내가 짰으나 하느님께서 준비해 놓으셨구나!’ 그래서 산속, 지치고 힘들어 하는 순례자 분들 앞에서 나는 묵상 내용과 함께 진심 어린 내 마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순례자 여러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는 여기 와서 흔히 갈 수 없는 곳 한 장소를 선정한 후, 힘들지 않게 여러분들과 멋진 순례의 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번 순례를 이끄는 저의 계획을 멈추셨고, 이 지역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아시는 봉사자 분의 마음을 가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계획대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 지역 교우촌 전부를 다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걸으면서 지나온 자리, 하나하나가 바로 교우촌이었습니다. 특히 처음에 길 잃었던 장소, 두 번째 길을 잃은 곳, 그리고 지금 이렇게 쉬고 있는 곳 등이 지금은 없어진 과거 교우촌 자리였습니다.”

함께 순례하는 분들의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계속해서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산길을 걷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박해 시대 신앙의 선조들이 겪었던 힘든 상황의 한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박해 시대에 포졸들이 교우촌을 덮치게 되면, 최소한의 생필품만 가지고 아이들을 업고, 품에 안고, 양손에 잡고 지금 우리가 걸었던 이 산길을 도망치듯 걸었던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 이렇게 길 잃고 힘들었지만, 신앙의 선조들은 도망을 다니며 ‘이렇게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싶은 마음으로, 그래도 하느님 때문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신앙 선조들의 그 마음을 체험시키고자 우리를 오늘 이렇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쉽고 간편하며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나의 계획을 접고,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진심 교우촌 신자들의 마음을 묵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이끌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순례는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순례였습니다. 나를 비롯하여, 그 지역을 손바닥 보듯이 아는 안내 봉사자마저 길을 잃게 만드신 하느님! 박해시대 교우촌 생활의 한 단면을 생생히 묵상하도록 이끄신 하느님의 놀라운 순례 일정! 그날, 정말 힘들었지만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 선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