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381) 한라봉 두 박스 사건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7-04-18 수정일 2017-04-19 발행일 2017-04-23 제 3041호 17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며칠 전, 함께 사는 젊은 수사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요셉 수사님, 수사님은 이스라엘 순례 가기 전과 다녀오고 난 후의 모습이 달라요. 성지순례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기 전 관대하고 너그러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요즘 이렇게 예민해진 거예요?”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달에 공동체의 배려와 동창 신부님의 사랑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 정말이지 많은 기도를 드렸고, 골고타 언덕에서 앞으로 잘 살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을 했는데…. 또 나와 함께 수도생활을 하는 동료 형제들을 정말 사랑하며 살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다녀온 지 며칠도 안 돼 젊은 수사님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것 자체가 마음 아팠습니다.

순례를 다녀와서도 몇몇 사소한 사건은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한라봉 두 박스 사건’입니다. 수도원의 은인 분이 제 이름으로 ‘한라봉 두 박스’를 보내 주셨는데, 받는 사람 이름이 강석진이 아니라 ‘강성진’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보내는 분이 누구신지 정말 몰랐습니다. 보내는 분을 확인하려고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기에, 그때 내린 나의 결론은 ‘보낸 사람 주소로 한라봉 두 박스를 다시 돌려주자’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수도회 형제들의 표정은, 주소도 정확하고 이름도 대충 맞으니 한라봉을 맛있게 먹자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엄격하고 단호한 마음을 먹으며,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전 내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설령 받는 사람이 ‘김석진’으로 오건, ‘강돌진’으로 오건, 주소만 맞고 이름이 비슷했다면 ‘앗싸, 이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 먹자’라고 말하며 오히려 먹자고 내가 더 설쳤을 겁니다. 그런데 순례를 다녀온 후로 거룩한 마음을 갖고, 열심히 살기로 다짐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엄격한 잣대를 가지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평소 친하게 지내는 정신과 의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고, 그 사건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정신과 의사는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강 신부님, 사람들이 자신 안에서 거룩함이라는 초자아를 형성해 나갈 때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거룩함이라는 초자아 속에 있는 엄격함입니다. 거룩함에는 늘 엄격함이 같이 따라 다니고, 그 엄격함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까지 엄격함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답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함과 엄격함.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들이 그랬고, 최근에 내 모습이 그랬습니다. 거룩함에 지향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삶, 그러나 그 거룩함을 잘 다루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거룩함 속에 있는 엄격함의 잣대로 자신과 타인을 단죄할 수 있습니다. 받는 사람 이름 철자 하나쯤 틀릴 수 있는데, 엄격의 잣대만 내세워 ‘투명하지 않는 것은 받거나, 먹을 수 없다’면서 한라봉을 돌려보낼 궁리를 했던 나!

거룩함 옆에는 엄격함이 늘 졸졸 따라다니지만, 원래 거룩함의 가장 친한 친구는 관대함과 온유, 너그러움과 이해입니다. 그 친구들 안에서 거룩함을 즐길 때, 매 순간 거룩함은 나를 겸손으로 이끌어 주고, 부활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따뜻한 거룩함이 그리운 오늘입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