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인사제 탄생 위해 국내외 수많은 기도와 지원 모여 특유의 재능과 덕행으로 기대 한몸에 받은 최양업 신부 프랑스 전역 성소후원 활발 조선 신자들도 목숨 걸고 활동 선발된 신학생 유학 지원 힘써
우리나라 첫 방인사제의 탄생,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탄생은 주인공인 김대건과 최양업의 공적이 주목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들의 탄생이 있기까지는 김대건과 최양업 뒤에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지원한 수많은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잘 조명되지 않는 듯하다. 최양업이 서품을 받던 그 시간에 드러나지 않게 성소를 후원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 “조선의 큰 희망”
선교사들, 프랑스의 수많은 신자들도 김대건과 최양업의 사제서품을 기다려 왔지만,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방인사제의 탄생을 염원했던 것은 조선교회 신자들이었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의 배경」에서 “지금까지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사람은 모방 신부로 알려져 왔다”면서 “그러나 모방 신부는 19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했고, 따라서 한 달 만에 교우들의 실정을 파악하고 신학생을 선발할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모방 신부의 신학생 선발 이전에 조선 신자들이 이미 신학생 선발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36년 모방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지도부에 보낸 서한에서 “교우들은 제가 약간의 소년들을 공부시키고자 하는 것을 알고 두 사람(최양업과 최방제)을 보냈다”고 신자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이 선발됐음을 알렸다. 김대건·최양업의 유학기간에도 조선 신자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학생들을 지원한다. 조선 신학생들이 유학을 가기까지 여정에는 정하상(바오로)를 비롯해 조신철(가롤로), 이광열(요한) 등 신자들이 중국 국경까지 동행했다. 또 조신철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등의 조선교회 밀사들은 중국을 오가며 조선 신학생들의 편지를 운반하기도 했다. 부제가 된 김대건이 조선에 입국하고 다시 중국을 향할 수 있도록 보필한 것도 현석문(가롤로), 이재의(토마스) 등의 신자들이었다. 박해 중 신학생들을 지원하는 일은 사실상 목숨을 건 활동이었다. 우리나라 첫 방인사제 탄생은 프랑스교회의 후원,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목숨을 건 활동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한 명의 사제가 탄생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따랐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사제를 양성하는 데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성소자 감소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성소후원금도 감소하고 있어 오늘날의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 탄생을 위한 신자들의 관심이 절실하다. 서울대교구 성소국 차장 최요안 신부는 “성소가 심어지고 자라는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해 그 이후로도 한국에 많은 신부님들이 탄생한 것은 그 뒤에 기도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와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며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관심 가져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중국 상하이 쉬자후이 성당 중국 상하이교구 쉬자후이성당은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은 이후 신학공부를 하며 머문 장소다. 당시 쉬자후이성당에는 예수회 신학원이 있었는데 최양업은 사제서품을 기다리며 이곳에 머물렀고, 교회사 학자들은 최양업이 이곳 쉬자후이성당이나 장쟈루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