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복음화 향한 간절한 마음 하늘에 닿아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 받는 중에도 포교에 대한 열망으로 귀국을 염원 부제수품 후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 상해서 사제품 받은 그해 12월 입국 7년 만에 조선 신자들을 만난 감격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담겨
경기도 남양 출신 최방제(프란치스코), 충청도 홍주 다락골 출신 최양업(토마스),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 김대건(안드레아). 1836년 12월 2일, 모방 신부가 지내던 서울 후동(현 중구 주교동ㆍ산림동) 사제관에 모인 신학생 3명은 성경에 손을 얹고 ‘조선 천주교회의 장상이 되실 분들에게 순종하고 순명할 것’을 서약했다. 조선교회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된 세 사람은 십자고상 앞에서 맹세한 이 서약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한 씨앗이 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씨앗은 그렇게 서울 후동의 작은 사제관에서 뿌려졌다.
사제가 되기 위한 여정 가운데서도 귀국의 꿈 키워 서약 이튿날인 12월 3일 교회 밀사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이광렬(요한) 등과 함께 서울을 출발한 세 사람은 압록강을 건너 12월 말 무렵 봉황성 변문(현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에 도착해 조선대목구 선교사 샤스탕 신부를 만났다. 샤스탕 신부를 변문까지 안내해 온 중국인 안내자들을 따라 중국으로 향한 세 사람은 몇 달을 걸어간 끝에, 다음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사제 수업을 받기 시작한 세 사람. 그 여정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5개월 남짓 되던 11월 27일, 최방제가 위열병에 걸쳐 선종했다. 게다가 아편 거래로 인해 광동과 마카오에서 일어난 소요 때문에 필리핀으로 피신을 해야 할 상황과 맞닥뜨렸다. 1839년 5월 3일부터 11월 중순까지 필리핀 마닐라 북쪽에 있는 롤롬보이 농장에 머물렀던 두 사람은 아픔을 뒤로 한 채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에 전념했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4년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최양업과 김대건에게 중대한 변화가 찾아왔다. 1841년 12월, 프랑스 극동 함대 세실 사령관이 리브와 신부를 찾아와 통역자 파견을 부탁한 것이다. 리브와 신부는 1842년 2월 1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전한다. “세실씨가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제게 통역 한 사람을 청했습니다. 저는 그 청을 하느님의 섭리로 생각하고, 세실씨에게 우리 학생 중 한 명을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세실씨에게 한 명의 통역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조선 포교지에 관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또 그 포교지를 돌보도록 그곳으로 누군가를 입국시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실 사령관이 지휘하는 에리곤호에 승선한 사람은 김대건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병을 앓고 있는 김대건이 에리곤호의 의사에게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이다. 5개월 뒤인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통역 자격으로 파즈 함장이 지휘하는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난다. 하지만 세실 사령관은 얼마 뒤 조선 원정 계획을 포기했고, 이에 최양업과 김대건도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요동으로 가서 입국 기회를 엿보기로 결정한다. 요동에서 백가점 교우촌(현 요녕성 장하시)을 거쳐 팔가자(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팔가자촌)의 소팔가자 성당에 도착한 최양업은 1844년 12월 이곳에서 부제품을 받는다.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