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 43,16-21 / 제2독서 필리 3,8-14 / 복음 요한 8,1-11 당신의 영을 채워 축복해주기 위해 모든 인간의 회개를 바라시는 주님 세상 고통 이겨내고 정직한 삶 살며 하느님 나라 입성하는 영광 누리길
지난 3월 8일 저희 신학원에서는 입학식이 있었습니다. 입학미사를 준비하면서 많이 기뻤습니다. 무엇보다 어느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에서 오직 주님을 향해서 도약하는 결단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가는 축복의 언어로, 제일 귀하고 고귀한 말씀으로 축하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분들 안에 자리한 ‘모자람’을 칭찬해 드렸을 뿐입니다. 부디 “하느님의 어리석음”(1코린 1,25)을 더욱 닮아 살아가시길, 기도드릴 뿐이었습니다. 이야말로 피조물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더 깊은 진리에 다가가려는 다짐이기에 그랬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겸손히 인정하는 귀한 고백이기에 그랬습니다. 사순 제5주일입니다. 이제 열다섯 밤만 자고 나면 온 세상에 주님 부활의 축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언제나, 항상, 변함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온 땅에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의 희망을 기대하며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이 복음 말씀을 읽으며 스러지는 기분입니다. 그날 예수님을 찾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거스른 행동에 재를 뒤집어쓴 느낌이 드는 겁니다. 그들의 유치한 행동이 너무 치사해서 마음이 언짢은 겁니다. 소위 하느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종교인들이 어찌 이렇게나 졸렬할 수 있는지, 어이없는 겁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잡아들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여의치 않았다는 복음의 전언인데요. 그도 잠깐, 이내 거푸거푸 자행된 ‘예수님 죽이기’의 모략이 끊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속이 타들어 가는 우리네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요한 사도는 더 교활해지고 훨씬 교묘해진 그들의 계획이 어둠 속에서 활개를 치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새삼 그날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묵묵하기만 했던 군중들이 야속해지는데요. 그들 중에는 분명히 그날 이른 아침, 성전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도 있었을 테니 말입니다. 아, 이쯤에서 힘없는 사제는 마음이 허탈해집니다. 매일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쏟아서 강론을 준비하고 들려주지만, 빨리도 잊어버리고 팽개쳐지는 현실이 와락 서럽습니다. 잠깐, 사제에게 한없이 요구되는 이해와 사랑과 관용의 무게도 버겁게 다가옵니다. 세상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다만 ‘덩달아’ 함께하지 않으면 무리에서 왕따를 당할 것이라는 심약함으로 인해서 한통속으로 뭉쳐, 서슴없이 손에 돌멩이를 움켜쥐는 군중이 산재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날 주님께서도 그들의 비열함에 마음이 아프고 민망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사탄의 꼬드김에 홀려서 악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속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눈에는 팽그르르 눈물이 돌았을 것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눈물을 감추시려고 시선을 내려서 땅에 무언가를 끄적이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