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전기의 저자 마리아 비노프스카는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것이 전기를 쓰게 된 동기라고 머리말에서 밝힌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친구 피에르가 절망에 빠져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그에게 도전해왔다.
『살육이 자행되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도 성인이 있단 말인가? 진정 성인,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한 성인이 있다면 내게 보여달라!』
전혀 알지 못 하는 사람 대신 아사 감방에 들어가 죽은 콜베 신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 친구는 그 위인에 완전히 매료되어 인간을 재발견함으로써 하느님을 다시 찾았고 끊어졌던 신앙의 유대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을 매료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는 콜베의 영성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에게 성모께 대한 신심, 사도적 영성 그리고 순교 영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합적 영성을 이룬다.
성모 신심
어려서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콜베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성모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게 되었다.
그의 오른 쪽 엄지손가락의 염증으로 뼈가 썩기 시작해 의사로부터 절단수술을 선언받았으나 루르드의 물을 구해 환부에 몇 차례 바른 후 완쾌의 기적을 체험했다. 그로 인해 그는 성모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의 용감한 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성모께 대한 콜베의 존경과 사랑의 표현의 일부를 어떤 이는 복음적 교리를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성모의 기사로서 대장 성모께 대한 열렬한 충성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문제없이 포용될 수 있다.
그는 구원사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구원 사업의 협력자로서 성모님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이해하며 그에 맞는 존경과 예우를 드린다. 그분은 인간이 예수께 나아가기 위하여 통해야 할 전구자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콜베의 성모께 대한 신심의 정통성과 탁월함은 교도권에 의해 확인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시복식 강론에서 콜베를 『마리아의 신비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찬미했던 위대한 성인들과 긴 안목을 지닌 성인들의 반열에 계신 분』으로 선언한 것이다.
사도적 영성
콜베의 선교사명과 활동 수행은 성모신심 안에서 더욱 성장해 나갔다. 그것은 『성모를 통하여 성모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성모의 기사회」의 목적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성모님의 전구와 도우심을 통하여 사람들을 복음화하고 성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콜베는 일생을 통해 「성모의 기사회」 운동을 추진하고 확산시키면서 선교하였다. 이 운동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추진해 나갔다.
이 잡지는 1939년에 폴란드에서만 1백만 부를 돌파했다. 점차적으로 「성모회 기사회」의 계획은 폴란드의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니에포칼라누프) 안에서 발전했는데 2차 세계 대전 즈음엔 650 여명의 수도자와 180명이 넘는 지원자가 거기서 살며 일했다.
콜베는 폴란드에서 성모의 마을이 세워진 지 3년 되던 해 동양 선교의 사명을 느끼며 일차 대상으로 일본을 선정했다. 장상의 허락을 얻은 그는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일본으로 떠났고, 도착 한 달만에 기적적으로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잡지를 출간했으며 두 해 후엔 성모의 마을을 세웠다.
선교에 대한 콜베의 열정은 한계를 모른 채 전진하며 세계 도처에 성모의 마을건립을 추진하며 복음화 활동을 하고자 했다.
일본을 향해 가던 중 사이공에서 콜베는 안남의 신부들과 접촉하여 그곳에서 성모의 기사 잡지를 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았으며 상해에서는 부호 로팡호로부터 중국어로 잡지를 발행하는데 필요한 자금 제공 약속도 받았다. 그는 한 편지에서 선교의 포부를 이렇게 전개했다.
『우리들의 사업이 일본에 단단히 뿌리 내리면 인도로 건너가 사업을 벌이고 다음에 아라비아인들을 위해 베이루트로 건너갈 예정입니다. 터키어, 페루샤어, 아라비아어, 히브리어로 잡지를 발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모의 기사회의 활동은 10억 독자, 즉 지구의 반에 미치는 것입니다』
일본에 도착한 지 2년 후 그는 인도에 가 에르나쿨람 대교구장으로 부터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는 허락을 얻었다.
그는 폐결핵과 과로로 몹시 쇠약했으나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선교 활동에 온통 투신했다. 그의 선교 활동은 수용소 안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는 어느 곳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은총이 절실히 필요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콜베는 고해성사, 영적 훈화, 상담 등을 통해 증오와 절망으로 가득 찬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데 전력했다. 때론 발각되어 심한 구타로 실신까지 했지만 그의 사도직 활동은 좌절할 줄 몰랐다.
수용소 안에서 그러한 사도직 활동 뿐 아니라 그의 모범적 사랑의 삶과 특히 헌신적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었으며 큰 위안이었고 복음 선포 자체였다.
순교의 영성
감방 동료를 살리기 위해 대신 아사실을 자청했던 콜베의 순교자적 죽음은 갑작스런 영웅심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다. 주님의 일군으로서, 성모님의 기사로서 그의 일생의 삶은 나날이 순교의 준비였으며 훈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헌신적 죽음은 그가 일생 살아온 방식의 마지막 귀결이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예사롭지 않은 신비체험을 했다.
어느 날 성모님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붉은 색의 상자였다. 그분은 다정스럽게 콜베를 바라보며 어느 것을 원하시는지 물으셨다.
흰색의 상자는 순결을 뜻하고 붉은 색의 관은 순교를 뜻한다는 그분의 설명을 듣고 콜베는 둘 다 원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성모님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사라지셨다.
이 발현 사건은 콜베가 죽은 후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동료 수사들에게 보낸 편지(1941. 10. 12)에서 밝혀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 사건을 말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으므로 그의 체험이 사실이었다고 확신했고 그가 순교자로 죽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주님께서 가르치셨고 실천하신 이 사랑을 콜베는 그대로 본받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을 예감했고 그것을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예고했다.
그는 또한 십자가, 고난 그리고 순교적 죽음으로 던져지는 것이 주님의 구원 사업 완성에 유익한 협력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수용소에서 함께 지냈던 이들이나 간수들은 콜베가 감방 동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주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가 수용소와 아사 감방에서 실천한 놀라운 사랑을 한결 같이 입을 모아 증언한다.
그는 수용소에서 전반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쉬운 일이 돌아오도록 결코 애쓰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동료들이 덜 힘들도록 가장 힘든 일을 선택했다. 그는 폐결핵으로 쇠약했지만 자신의 몫의 음식을 자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애덕을 실천했다.
감시원들의 엄격한 경계와 금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료들에게 사제로서의 임무를 기회 되는대로 부지런히 수행했다. 콜베의 기도와 격려 고해 성사와 영적 훈화 등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의 위로, 희망, 용기를 얻었으며 절망과 자살의 유혹을 극복했는지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콜베의 아사행 자원은 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 이상의 동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목격자들은 증언한다. 즉 9명의 다른 사람들을 절망으로부터 구제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인간이 만든 가장 잔악한 그 곳을 사랑으로 정복해 나갔다. 미움을 사랑으로, 모욕을 용서로, 저주는 기도로 바꾸어 나갔다. 콜베의 영웅적 사랑은 간수들에게조차 충격적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