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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그리스도인] 57.신학철학자편 (4)성 토마스 아퀴나스(상)

이주연 기자
입력일 2005-06-26 수정일 200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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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3년 시성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대우 받기도 했다.
“독창적 그리스도교 철학 발전시켜”

진리 연구와 옹호 위해 일생 바치며 ‘신학대전’ ‘대이교도 대전’등 저술

「스콜라 철학의 왕」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로 존칭되는 중세 유럽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그의 생애는 한마디로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로 표현된다. 연구와 저술과 교수 생활로 일관하면서 진리 연구와 옹호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깊은 영성으로 충만했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대이교도 대전」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등 방대한 저작을 통해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꼽힌다.

거의 모든 학문 영역에서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 사상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는 한편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을 확립함으로써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 세속적인 근대 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으로 남아있다.

도미니코수도회에 입회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열네살 되던 1239년 교황 영토와 황제 영토 경계선에 위치한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황제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자 나폴리 대학으로 옮기게 된다.

이곳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 연구를 통해 복음 전파를 목표로 삼는 탁발수도회 도미니코회를 접하게 되고 가족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게 된다.

그 배경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 선포를 향한 열정으로 풀이된다. 신학대전을 통해서도 밝히고 있듯 「가르친다든가 설교하는 일은 관상이 차고 넘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단순한 관상보다 우월하다. … 따라서 갖가지 수도회 가운데 최고의 단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수도회다」(188문 6항)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파리를 거쳐 알베르토 막뉴스 지도아래 쾰른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게 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알베르토의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기 철학과 신학의 도구로 받아들였다.

이후 알베르토의 추천으로 파리대학 교수 후보자로 추천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1252년부터 파리에서 성서와 룸베르투스의 명제집을 강의했고 1254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아 1259년까지 파리대학에서 강의했다.

당시 신학과 교수의 주요 직무는 성서의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와 설교였는데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 등이 당시 저술한 대표적 저서다.

관례에 따른 3년간의 교수 직무를 마친후 이탈리아로 돌아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약 10년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코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 활동에 전념했다.

전문가들은 이 시기를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의 사상을 두드러지게 성숙시킬 수 있었던 때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같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인 모르베카의 길레루므스 번역에 힘입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 철학의 정교한 연구를 달성했으며 교황 울바노 4세의 요청으로 동방교회와 공동으로 그리스교부 및 교의사의 본격적 연구를 시도했다.

「대이교도 대전」, 정기토론집 「신의 능력에 대하여」, 4대 복음서의 연속 주석 및 「신학대전」 제1부 등이 당시의 대표적 저작이다.

1269년 탁발수도회 배격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에 대처하기 위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됐고 작은형제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보수파 등 3개 파와 논쟁하면서 「신학대전」 제2부, 몇가지 정기 주석과 정기 토론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 주석 등을 펴냈다.

1272년 도미니코회의 새로운 대학 설립을 위해 나폴리로 돌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저서와 병행하면서 「신학대전」 제3부를 연이어 저술했다.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성니콜라오의 축일 미사후 돌연 집필 중단 모습을 보였는데 이에대해 자신은 『나에게 새롭게 계시한 점에 비하면 이제까지 저술한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이단 선언의 대상 되기도

1274년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병든 몸을 이끌고 리옹공의회로 향하던 중 병세가 악화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에 있는 포사누바 시토수도원에서 눈을 감았다.

사후 그의 가르침은 동시대에 상당한 새로움으로 다가왔으나 학설 일부는 1277년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이단 선언 대상이 되기도 했다.

1323년 시성된 토마스 아퀴나스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 정통성의 시금석으로 대우 받기도 했다.

이주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