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방한 케이프타운 대교구장 헨리 대주교

리길재 기자
입력일 2012-03-20 10:46:43 수정일 2012-03-20 10:46:43 발행일 1996-07-14 제 2011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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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분리정책에 맞서 체포·구금되기도 한 남아공 유색인의 대부
만델라·투투 주교와 비견되는 인권운동가
빈민가 돌며 주거·고용문제 개선에 전력
『「까페오레」대주교 입니다. 우유에 커피를 탄 피부색을 가졌거든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주교라 해서 유색인종이라고는 상상도 못해 잠깐 당황한 기자의 모습을 눈치 챈 헨리 대주교는 『다들 자신을 보고 놀란다』며『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늘 「까페오레」대주교라고 소개한다』고 말했다.

혼혈인 대주교

7월2일 방한한 남아공 케이프타운 대교구장 로렌스 헨리(Lawrence Henry·62)대주교는 『익히 들어왔던 한국교회의 발전상을 눈으로 확인하고 동기인 포항 대해본당 주임 박병원 신부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다』며 자신의 방한에 큰 의미를 두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한 남아공 교계 지도자들 중 첫 번째 손님이어서 그의 방문에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과 성공회 투투 주교와 비교, 종교 지도자로서 가장 순수한 인권 운동가로 존경받고 있는 헨리 대주교는 한국교회의 엄청난 사제성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6월28일 교구 소속 2명의 부제에게 사제품을 주고 왔다』는 헨리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한국교회에 1천6백여 명의 대신학생이 있고, 서울대교구에서만 7월5일 31명의 새사제가 탄생한다는 말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첫인상을 밝혔다.

헨리 대주교는 과거 남아공 인종 분리정책에 반대해 체포, 구금되는 등 사제로서 남아공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왔다.

정책의 최대 피해자

그는 남아공 백인과 흑인들이 모두 증오하는「혼혈인」 이었기에 인종 분리정책에 가장 큰 피해자로 평생을 살아왔다.

남아공은 지난 40여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백인이 아닌 어느 누구도 국가 운영에 관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같은 실정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헨리 대주교는 남아공 국민들이「기적적인 선거」로 일컫는 1994년 민주선거 이전에는 백인만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도 만 60세에 처음으로 투표를 해 보았다고 고백했다.

교회 역시 94년 이전까지 백인 신부가 흑인 지역에서 사목한다는 것은 꿈에서 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공 가톨릭교회는 정부의 인종 분리정책을 강력히 반대해 왔고 그 죄악상을 폭로해 왔다.

가난·불평등 여전

만델라가 정권을 잡은 후 사회가 급속히 개방되고 있지만 40여 년 지속돼온 분리정책의 여파로 여전히 가난과 불평등, 높은 실업률에 흑인들과 유색인들은 고통을 받고 있다.

남아공에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 불붙을 무렵인 1990년도에 수도 케이프타운 대주교로 서임, 교구장직을 맡게 된 헨리 대주교는 흑인과 유색인들의 주거와 고용 문제 개선에 큰 힘을 쏟고 있다.

헨리 대주교는 남아공 인종 분리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였으며 빈민층 밑바닥 생활에서 남아공의 대표적 종교 지도자로 유색인종의 대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녀로 일하기 위해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남아공으로 이주해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헨리 대주교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인종차별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잡일로 학비벌이

학비가 없어 학교 사원으로 취직해 잡부로 일하면서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를 마친 헨리 대주교는 대신학교에 가기 위해 또 다시 3년간 낮에는 고무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라틴어를 독학했다고 한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한마디로 인간 성숙을 위한 교육의 장이었죠. 아마 그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젊은 시절 내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갖은 고생 끝에 신학생으로 선발됐지만 남아공 어디에서든 그를 맞아줄 신학교가 없었다. 남아공에는 백인을 위한 신학교만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 신학교 뿐

그래서 헨리 대주교는 교구장의 배려로 로마에 가서 신학공부를 하게 됐고, 울바노대학에서 동기인 박병원 신부를 만나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됐다고 한다. 헨리 대주교는 『당시 옆자리에 앉은 박병원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워가며 신학 공부를 했다며 아마 박 신부가 없었다면 신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함께한 박병원 신부의 어깨를 감싸며 옛 추억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는 1963년 사제가 된 후 첫 임지로 유색인종 지역의 성 십자가본당 보좌로 부임했는데, 2년 후 이곳이 백인 지역으로 선포돼 8만 명의 유색인종이 강제 이주당하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물론 그도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 헨리 대주교는 『1987년 주교로 서품됐어도 백인이 다니는 극장은 물론 백인들이 타는 대중버스조차 타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헨리 대주교는「그리스도에 살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그의 사목 모토이기도 하다.

월 생활비 9만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정답게 친구가 되고 어버이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고 말하는 헨리 대주교는『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교구내 사제와 똑같이 월 미화 1백20불(한화 약9만원)을 받아 생활하면서도 매일 오후 1시부터는 시내 빈민가를 방문,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있는 헨리 대주교는 『교황 요한 23세처럼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리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