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구원 주제로 꾸준히 ‘역사소설’ 창작 초 2 때 세계 그림 전시회 입상… 타고난 예술 재능 “시국 문학과 차원 다른 격조 높은 민중문학” 評
- 연필로 쓴 장편소설
작가 한무숙은 1918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두 살 때 가족이 부산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그림 전시회에서 입상을 했으니 그는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부산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에는 동아일보에 연재된 김말봉의 장편소설 「밀림」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940년 결혼을 한 후에는 남편이 지금의 서울상대 전신인 서울고상 출신으로 경기도 광주 곤지암의 금융조합이사에 부임하게 되어, 그곳 조합 사택에서 신혼기를 보냈다. 이때 한무숙은 완고한 시가 가풍과 여의치 못한 생활여건 속에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달리 택한 예술적 작업이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혼자 조용히 글을 쓸 수 있었다. 소설을 실제로 쓰기 시작한 계기는, 어떤 지면에서 장편소설 모집 광고를 우연히 발견한 데에 있었다. 그는 서울로 출장을 가는 남편에게 원고지를 사다 달라고 했다. 소녀 시절에 신병으로 입원을 하기도 했을 만큼 허약한 건강 탓에 한무숙은 누운 채로 글을 썼다. 이렇게 글을 쓰는 데엔 연필이 제격이었다. 그는 누워서 벽에다 원고지를 대고 소설을 썼다. 이렇게 하여 1942년에 잡지 ‘신시대’의 장편소설 모집에 투고했다. 「등불 드는 여인」이란 제목의 장편소설로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1940년대라는 시기는 일제가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때였고, 대동아전쟁이 막판으로 다가가면서 문학예술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던 때였다. 한무숙 소설작업의 본격적인 재개는 1948년 국제신문의 장편소설 모집에서 「역사는 흐른다」로 다시 당선이 된 것이다. 이 장편소설도 한무숙은 연필로 썼다. - 평화를 위한 언어 장편소설 「역사는 흐른다」는 한무숙 소설에서 실제적으로는 첫 번째 작품이다. 1948년에 발표된 이 소설에 대해 1970년대 작가인 이문구가 새삼 놀라워하고 부끄러워하는 평을 썼다. 그것은 우선, 이 소설이 다른 어느 작가의 소설에 비할 수 없게 풍요한 민족어의 곳간이라는 것이다. “홍명희의 「임거정」에서 사대부와 불한당의 면면을 통해 양극에 치우친 민족어와 풍속을 발견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 양극에다 폭넓은 중간 계층을 더하여 보다 평균적인 민족문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우리의 전통 문장을 가늠하는 전거를 민족어의 구사력에 두고 본다.” 젊은 작가이지만 민족의 토착어 문장 구사에 탁월하다는 평을 받는 이문구가 한무숙의 「역사는 흐른다」를 대하고 한 말이다. 이 평에서 그는 한무숙의 소설이, 한국 현대 소설에서 민족적 체취와 숨결이 배제되고 다국적 번역 문체가 풍미하는 시국 문학과는 차원이 다른, 격조 높은 민중문학이라고도 했다. 한무숙의 「역사는 흐른다」는 조선조 말엽 민족의 수난과 격동 속에 전개되는 조씨 가문 3대에 걸친 영욕의 생활사와 일본군을 탈출한 조선 학병들이 중국에서 광복군에 들어가는 과정까지 다루었다. “난 탈주할 거야. 광복군에 몸을 던져 놈들을 무찔러서 독립의 초석이 될 거야.” 한 조선인 학병의 말이다. 그리고 소설은 해방 직후 분단 현실의 갈등까지도 다루었다. 작가 한무숙도 자신이 소설 「역사는 흐른다」에 대해 한 말이 있다. “나는 3대에 걸쳐 어느 집안사람들 이야기를 썼던 것이지만, 어떤 개인이든 집안이든 간에 아무리 눈과 마음의 문을 닫고 역사의 변천과 사회의 생활 현장에서 고개를 돌리고 인습과 아집에 고착되어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존재하는 당대 사회의 여건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안의 사연들은 어쩔 수 없이 ‘역사’와 동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이 이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의 소설을 민중문학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역사소설이 이러하면서도 다채로운 단편들 속에서 돋보이는 민족전통언어의 짙은 질감은 문화의 자산으로, 그는 인간 구원을 주제로 꾸준히 창작 작업을 추진했다. 1978년에 발표한 「이사종의 아내」와 1981년에 발표한 「생인손」이 특히 전통 언어의 밀도 짙은 구사를 담고 있다. “당치 않은 호강은 그대로 깔고 앉은 바늘방석의 바늘 수만 늘려가게 하와요. 천주님, 신부님, 쇤네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오. 불쌍히 여겨 주옵시오.” 마리아 할머니는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신부는 노파의 머리 위에 성호를 그었다. “주의 평화가 그대와 함께. 고해 신부가 주는 평화, ‘평화’가 구원이다.”(「생인손」) 구중서(문학평론가) - 1960년대부터 문학평론 활동을 펼치고 민족·민중문학을 연구하면서,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겨왔다. 문예지 창간에 이어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가톨릭 잡지 「창조」도 창간했으며, 수원대 국문과 교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가톨릭신문사 편집장,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구중서(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