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신조선포 140주년 기념논단-티없는 삶, 흠없는 삶/이정운 신부

이정운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입력일 2017-07-13 05:11:00 수정일 2017-07-13 05:11:00 발행일 1994-12-04 제 1932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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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염시태 성모는 완성된 인간 상태

비오 9세 1854년 정의 선포
미래에 완성될 천상교회의 예시
조선교구 설정 당시부터 주보…모든 한국인의 주보
성탄과 구세주 재림을 준비하는 신자들의 자세 일깨워
◆무염시태 신조

가톨릭교회의 신조(信條)들 중에 하나인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시태(원죄없는 잉태) 신앙교의는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그녀의 존재 맨 시초에 즉 그녀의 잉태 첫 순간부터 원죄로부터 자유로왔다는 신앙을 말한다.

마리아 이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죄로 얼룩진 인간 본성을 물려받든다.

그러나 마리아만은 그리스도의 단일한 은총으로 이 원죄로부터 보호되어 원죄에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 본성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신앙교의는1854년 12월 8일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톨릭 신앙으로 정의 선포되었었다. 이 교의가 정의되어 선포되기까지는 참으로 장구한 역사의 파노라마가 이어지고 있다. 이 신조는 6세기 동방교회에서 예비적으로 시작되어 19세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 신앙의 출발은 마리아의 신적 모성의 직무와 품위는 신선성과 비례해야 한다는 사상에서 비롯하고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의 내리심의 거처가 될 수 있는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아담 안에서 탓과 허물을 지닌 인간 본성이 스스로 이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것인가? 신학적 이성이 요구하는 자격 조건은 신성성이다. 이 말을 구체화하면 무죄, 흠과 티가 없는 자격 조건 이다. 이 조건은 구속된 인간의 상태이고, 완성된 인간의 상태이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 시원정의(始原正義)를 보존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이렇게 완성된 상태를 마리아에게만 부여하는 경우라면,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보편성은 마리아의 특전과 충돌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의 유죄와 구원의 보편성이 또한 교회의 신앙이 때문이다. 구원이란 기원죄와 사실죄를 멸하는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업이다. 때문에 마리아도 유죄의 보편성 안에 포함되지 않을수 없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시원정의 회복과 유죄의 보편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원의 보편성 문제를 놓고 볼 때에 마리아의 신적 모성의 자격 구비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작용 안에 포함되어야 하고 신적 모성의 자격 구비를 그리스도의 내림(강생) 이전 어떤 시간 안에서든지 가능한 것으로 본다면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의 아들의 합당한 거처가 되는 자격 조건에 있어서 흠과 티를 그녀의 존재 안에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 시작 순간으로 상승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신앙감이 작용한다.

그래서 신학적 결론 이전에 이 신앙감은 신학의 기저에서 그 근거를 일러주고 있다. 교회는 이 교의를 정의하기 앞서 먼저 이러한 신앙감에서 마리아의 잉태를 경하하는 축제를 거행해 왔으나 성서와 전승의 확실한 근거를 깨닫게 되기까지는 계시의 직전과 더불어 신학적 인식의 결정을 확인해야 했다.

흠없는 인생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예속되는 신앙과 행위의 인격적 변화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래서 크리스챤 인격성의 책임과 역할은 바로 모든 시대 안에서 마리아가 지녔던 품위를 닮아(Similitudo) 그녀처럼 살아가는 실존적 삶이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반도의 주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그러니까 조선교구에서 한반도가 여러 교구로 분리되기 이전에는 한 목자의 음성 밑에 속하여, 한국 초대 교회부터 전해져 오는 이 신앙을 전례와 생활속에서 지금보다는 열렬하게 거행해 왔고, 조선교구 설정(1831년 9월 9일) 당시부터 무염시태 성모성심회(Co-nfraternitas lmmaculati Cordis B.V.Mariae)가 설립되어, 신앙과 전례, 신심과 생활로 열심히 생활해 왔다. 현재까지 각 본당 안에 전해 내려오는「성모회」는 바로「무염시태 성모성심회」의 약칭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둔다.

조선반도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져 성장되기까지 이 반도는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북경교구의 주보는 성 요셉이었다. 조선반도는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으므로 성 요셉을 모셔왔다. 그러나 1831년 9월 9일에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도어 조선교구가 설정되게 되자,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Imbert, 범세형, 라우렌시오) 주교는 1838년 12월 1일, 교황청에 조선반도의 주보를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주보로 받들어 모시도록 허락을 요청했다. 조선교구를 설정하신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께서는 이 청원을 수락하시면서(1841년 8월 22일) 지금까지 모셔왔던 성 요셉도 같은 주보로 모시라고 이르셨다(최성우, 안응렬, 역주「한국 교회사」하권, 1백36면 각 주 39 참조).

조선반도(=한반도)가 아무리 여럿으로 분리되어 독립 교구로 설정된다 하더라도 역사 안에서 모셔온 주보들을 폐쇄하지 않도록 함을 조선교구 주보 설정문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한반도와 원죄없으신 성모님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신앙의 발전과정

마리아의 성덕에 대한 인식과정은 마리아의 성덕의 위대함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정과 모든 죄에서 시원적으로 보호되셨다는 인식과정으로 구별되고 있다.

초기 교회는 마리아의 탁월한 성덕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완전한 성덕에 대한 인식으로 점차 발전해갔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마리아를 「거룩하신분」(Sancta) 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였지만,「절대적으로 무죄하신 분」(abso-lute immaculata)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전승 안에서 보는 무염시태 사상의 명확한 출현은 4세기 성 에프렘부터이다. 그는 구세주의 모친은 아무런 오점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띠노는 원죄는 상속되는 사욕편정을 통해 부부관계에 의해서 전해진다고 생각하였다.

6세기에 동방교회에서는 성모성탄축일이 거행되었고, 7~8세기에는 성모 성탄 전 9개월 전에 성녀 안나의 잉태축일이 12월 9일에 거행되었다. 안나의 잉태는「기이한 잉태」 즉 하느님의 전능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잉태는 구약의 불임녀들이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잉태하는 설명과 아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기이한 잉태」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안나의 잉태 축일은 9세기에 이르러 이태리 남부를 거쳐 이태리로 전해지고 11세기에는 영국에 전해졌다. 그 후에 (1127~28년경) 안나의 잉태 성격에 대하여 처음으로 토론의 주제가 되어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를 거론했다. 이렇게 서방교회 안에서 무염시태 신앙은 1121년과 1130년 사이에 그 모습이 드러났으며, 이 사상이 점차 주의를 끌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129년에 런던공의회(지역공의회)는 이 축일을 공식 승인하였다. 처음에는 다만 부수적으로(incide-ntly)만 논의되었다. 무염시태 축일이 거행되었다 하더라도 마리아의 잉태가 확실히 무염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고, 다만 그 사건을 경하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영국의 수도자 에드머(Eadmer, 1060/64~1130)는 그의 소 논문「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De Con-ceptione B. Virginis Mariae)에서 이 축일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방어하고 두둔하였다(PL 159.301~318).

이 축일은 재빨리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13세기 말에 프랑스의 거의 모든 교구들이 이 축일을 거행하게 되었고, 영국은 이 축일을 의무 축일로 하였다<1287년 엑스터(EX-TER) 공의회 결정>. 급기야 동방교회와 직접 혹은 간접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면서 동방의 교회들처럼 성모의 무염시태 교리를 펴며 축일을 거행하던 신학파와 서방교회 안에서 일어난 원죄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신학파 간에 반드시 한 번은 치러야 하는 환경에서 논쟁의 불길이 일어나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대립과 논쟁의 불길이 거세지게 되었다. 이 논쟁들의 주장들을 대별하면 첫째로 성 베르나르도(1060~1153)의 유죄론, 성 토마스(1224~1274)의 성화론, 그리고 영국인이면서 옥스포드 출신이며 프란치스칸 수사였던 요한 둔스 스꼬뚜(John Duns Scotus. 1264~1308)의 선행구속론이다.

이 신학 논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그동안 침묵 중에 자유로운 토론을 지켜보던 교도권은 교회의 평화를 옹호하고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식스도 4세(1471~1484)는 당신의 교황헌장 「꿈 쁘레엑스첼사(Cum Praeexcelsa)로 무염시태 신학 논쟁에서 서로 이설자라고 공격하는 것을 금하고, 신자들이 초대 교회부터 중세를 거치며 믿어온 신앙에 동조하여, 무염시태 신앙과 전례적 거행을 승인하고 로마 교회 안에서 이 축일 거행을 허락하고, 전례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DZ734: Ds1400 참조).

드디어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베드로 좌에 오른 이래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와 세계 주교들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에 따라 지금까지 믿어내려온 성모의 무염시대 신앙을 교좌에 서서 전 세계에 성대하게 정의 선포하게 되었다(Pii IX Pontificis Maximi Acta 1/1,565~619: 이정운 역주)「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

(수원가톨릭대학 출판부 1994년 12월 8일).

◆신학적 의미

이 축일은 세 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시민 자격을 미리 입어 그리스도의 강생에 앞서서 이 세상에 오신 나자렛 동정녀 마리아(루가 1, 28 이하 참조)는 성탄을 준비하는 그리스도 신자 모두에게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내재케 하기 위한 영혼들의 자격 조건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고, 미래의 완성될 교회의 예형(Typus)으로 티없이 깨끗하게 잉태되셨다는 교리는 구세주의 내리심의 목적과 결과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 가깝게는 먼저 오신 주님을 향모하고, 보다 더 가깝게는 현재 안에 오시는 주님을 티없는 영혼으로 영접하려는 크리스챤 신앙의 삶을 촉구하며, 이미 와 계시지만 아직 그 모습을 완전하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세 말에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수천 년 동안 메시아를 기다리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계승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로 하여금 마리아처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어떠한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는지를 일러주고 있다. 무염시태 신앙은 다만 마리아에게만 적용되는 교리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교회가 마리아의 자세로 다가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함을 일러주고 있다. 마리아는『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아담의 혈통에 결합되어 계실 뿐더러…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되셨다』(교회 53).

조선교구 설정 당시부터, 조선반도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은 인류 구원의 여명이자 완성을 한 눈에 보고 조선교회가 티없고 흠없는 삶을 살아 다시 오실 주님을 마리아처럼 영접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명동 성모동굴과 대구 남산동 동굴 앞에서 벨라뎃다처럼 마리아를 바라보며 티없는 삶, 흠없는 삶을 다짐하고 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부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염시태성당과 동굴인 서울 명동과 대구 남산동이 성모 순례지로 성대하게 선포되고, 모든 사제가 언제나 여행 또는 순례 때에 자유롭게 미사성제를 봉헌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게 되기를 간청하는 바이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성 마리아여, 우리나라를 위하여 빌으소서.』

이정운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