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에서 피사로 가는 길목은 정말 아름답다. 어느해였던가 들판 여기저기에서 흐드러지게 꽃피는 5월 어느날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나는 처음으로 토스카나지방의 저녁노을을 만나게 되었고, 그 잘못 접어들은 시골길에 대한 추억은 늘 가슴 속에 남아 이 숨막히는 도시의 빗장을 살짝 열고 잠시 빠져나가는 에뜨랑제의 문이 되었다.
시에나에서 피렌체, 피렌체와 몬테카티나, 루카를 잇는 토스카나 지방의 전원풍경이야말로 이곳을 찾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토스카니니(토스카나의 작은 사람)로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 황혼녘의 고요하고 유장한 풍광을 경험한 사람이면, 오래된 돌담사이로 제멋대로 자란 엉겅퀴꽃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사이프러스 관목과 올리브 숲 사이로 마지막 그날의 빛이 사라지는 토스카나의 낮은 언덕과 황금빛 구릉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시간들은 가시덤불 사이로 피어오르는 라벤터 향과 어우러져 여기저기에서 하늘거리는 마아가렛의 하얀 꽃무덤 사이에서 멈추어 버릴 것이며 이 분수를 모르는 노스탤지어는 이국의 시골길 어딘가에 꼼짝않고 박혀있다가 문득 가슴앓이를 되새기는 순간들을 만들고 거리의 문들이 닫히고 도시의 밤이 내릴 때면 사람들의 마음을 먼나라로 다시 실어가고마는 것이다.
하여 이 지방을 찾을 때마다 꼭 이 길을 다시 들르는 것이 내겐 습관처럼 되었다.
늦가을의 상큼한 저녁 연기속에서 프란체스코 카노바(1497~1543)의 류트음악을 들으며 이 古典으로의 여행을 내게 주신 주님을 찬미하며 토스카나의 밤을 이리저리 구불대다가는 루카에도 못들리고 온천으로 유명한 몬테카티니에서 1박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몬테카티니의 산정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밤풍경과 함께 『아리베데치토스카나!』라고 하면서 한잔의 Brunello di Man-talcino라는 이름의 시에나 포도주(이 술병에는 시에나의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의 유명한 그림 귀도리치오 다 포리아노 장군의 기마상이 그려져 있다)에 취하는 것도 좋다. 왜냐하면 피사까지 갔다가 그대로, 리비에라 해변을 따라 이곳 토스카나를 그냥 떠나기에는 정말 아쉽기 때문이다. 일요일인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가을이 성큼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는 아스토리아 호텔 앞떼르미니 장원에서 찝집한 천연소다수를 한잔 들이키고 피사로 길을 떠났다.
제노바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루카를 지나쳐 70km를 더 달리면 Pis-a Nord라는 싸인이 나온다. 여기에서 남쪽의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지극히 평범한 작은 도시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옛날의 화려했던 해상도시의 활기는 아무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라앉은 분위기가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이탈리아는 매년 약 7mm씩 서해안이 융기하고 아펜니이노 산맥 동쪽 즉 아드리아 해안 쪽이 침강한다. 그 옛날 폼페이와 마찬가지로 피사 역시 십자군 전성기 때 베네치아 못지않은 해상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였다.)
피렌체에서 내려오는 아르노강은 피사 남쪽을 지나 지중해로 흐르지만 강폭은 별로 넓어지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로마시대부터 배들이 이 아르노 강하구 어디에선가 짐을 부렸을 것이다.
피사의 대성당인 산타 마리아 교회는 1063년에 시작하여 1118년에 당시 교황에 의하여 축성을 하였고 1153년에 완공을 보았다. 이 건물은 돌리키오 출신의 부스켓토의 감독과 설계로 되었다는 바 자리의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사탑으로 유명한 8층의 종루는 1173년에 굴리엘리모(Gu-glielimo)와 보난노(Bo-nnano)가 합작으로 착수하였는데 기초말뚝지정을 반밖에 하지 않은데다가 바닷가의 연약 지반으로 기초부터 기울고 말아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234년 인스브르크 사람 빌헬므가 나머지를 완성시켰다.
그 당시 보난노는 대성당 청동정문도 함께 제작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1596년 화재로 소실된 그의 작품이 아니고17C에 와서 다시 제작된 것이다. 보난노 피사노의 것으로 남아있는 작품은 대성당 소매체의 문 성 라니에리의 문(San Ranieri)에서 볼 수 있는데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신약성서를 주제로 하 고 있으면서도 표현양식에 있어서 비잔틴과 동방요소를 강하게 읽을 수 있는 로마네스크 부조의 걸작이다.
대성당 전면에 나와 있는 세례당은 사탑보다 뒤에 착공된 것으로서(1153~1256) 직경 39m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 건물이지만 14C에 와서 상부는 고딕식으로 증축 장식되었다.
피사 대성당 옆에 조용히 그리고 하얀 죽음처럼 길게 누워있는 건물이 미술사에서는 피사 사탑보다도 중요한 장소「깜포산토」(Campo Santo: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으로 교회의 공동묘지 내지는 납골당을 지칭한다)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로 가져온 고대 유물인 석관들이 몇개 있었는데 그 이름과도 같이 피사 출신임이 분명한 니콜라 피자노는 이 석관 중에 새겨진 그러스신화 즉 페드라와 히폴리루스의 비련을 담은 석관 부조에 심취하여 그가 세례당의 독서대를 제작할 때 이것을 교과서로 삼았다.
즉, 세례당에 있는 독서대 조각 중『아기예수의 공현』장면에 나오는 성모 마리아는 히폴리루스와 사련에 빠진 새어머니 페드라를 그대로 옮겨 논 것이어서 알고 보면 좀 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적당히 안다는 것도 일종의 행복이다. 니콜라의 아들 지오반니 역시 성당의 독서대를 만들었는데 아버지가 만든 세례당의 것 못지않게 훌륭한 것이다. 특히 헤롯 군사들의 영아 살해 장면에서 보이는 처절한 장면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족하여 자식 잃은 예루살렘 어미들의 비명이 절로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바로 그 옆에 천역덕스럽게 등잔(candle)을 올라타고 있는 어린 아기들을 보면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기억난다.
이곳 피사에 새로 생긴 대학의 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미사 시간에 이 등잔이 일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전자운동의 주기에 관한 학설을 생각해 내었다는 역사적 발견이 그것이다(피렌체 공회국은 피사를 점령한 후 문화융화 정책의 일환으로 대학을 세웠었다.)
지오반니 피사노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대신 살해당한 영아들이 천국에 가기 전에 램프 위에서 장난치고 있는 것 같은 처절함과 천진함의 두 장면을 독서대와 그 위를 비추는 대형 캔들에서 연상케 되는 것 역시 예술가들이 미리 의도해 놓았던 것은 아닐까.
피사 대성당은 다른 이탈리아 도시의 대성당이 도심 한가운데 포장된 광장을 앞에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성벽과 푸른 잔디밭 위에 자리한 개방공간을 지니고 있어 매우 고즈넉한 분위기를 던져 주고 있다.
14C까지 이탈리아 대성당 교회 양식은 본당과 세례당 종루라는 3개의 건물이 명확히 구분지어졌고 특히 성격상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붙이게 되어 여기서도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성 지오반니 교회라 불리운다.
피사 대성당을 놓고 로마네스끄 건축양식을 장시 조명해보면 그 특징이 확연히 잘 드러나고 있다. 막힌 아케이드(Blinde Arcade)라고 불리우는 본당과 깜포산토의 정면 그리고 수평줄눈이 강조되는 양식과 원형아치로 대표되는 로마네스끄의 외관과 고대 로마제국의 바실리카 식평면에 당시의 신학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로서의 교회를 상징 가미한 소위 라틴크로스 평면양식의 전형이다.
성당내부에는 역시 많은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그들의 예술과 기량으로 주를 찬양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는데 정면 제대위의 반구형 돔 모자이크에 아로새겨진 그리스도 상은 피사 출신의 화가 프란치스꼬가 명암기법을 살려 14세기에 제작한 것이고 그 옆의 복음사가 성요한은 르네상스 여명기의 화가 지오반니 치마부에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감실의 세공은 한때 미켈란젤로의 스승이었던 도메니꼬 기를란다이오의 작품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모든 예술가들에게 특히 프레스코를 전공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피사를 찾는 제일의 목적이 있다면 지오반니 피사노가 건축한 깜포산토를 방문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만치 역대의 뛰어난 토스카나의 예술가들은 피사사람들의 대를 이은 간곡한 초청에 감복하여 뛰어난 그들의 기량을 이 한적한 공동묘지 벽에 펼쳐놓았다.
죽음의 승리로 유명한 트라이니 프란체스코를 필두로 지웃토나 부팔마코 그리고 아직도 일부 사람들이 죽음의 승리가 그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안드레 아 디 치오네 오르가냐(1308~1368), 스피넬로 아레티노, 베놋조 고졸리(1420~1498)등과 그밖에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화가들이 각축전을 벌이고 선대화가들에게 지지않으려고 온갖 고민과 노력을 이 회랑에서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낭패스럽게도 이러한 인류의 보고는 2차 대전의 폭격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고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타다 남은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 베놋조 고줄리의 아름다운 구약성서 이야기 역시 대전 전에 찍어둔 희미한 흑백사진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다만 그가 피렌체의 메딧치가의 교회당에 그려놓은 동방 박사의 행렬을 유추해보면서 그 옛날 바자리가 극찬하였던 그림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는 것이다. 한가지 희한한 것은 1944년 7월 폭격으로 인한 화재가 많은 그림들을 태웠지만 프레스코 연구가에게는 희소식도 있었다. 걸그림이 타고 난 자리에 밑그림들 즉 Opera Primaziale(Opera는 opus의 복수형 즉 작품들이라는 뜻)가 발견되어 그 당시 그림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다시「죽음의 승리」이야기로 돌아가자. 인생의 덧없음을 그린 이 불후의 프레스코 작품은 많은 다른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으니「청중은 어디서나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으로 젊음을 자유분방함으로 뭇 여인들과 지새웠다가 그리고 말년에는 수도복을 입은 메피스토 펠레스였던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작품 순례의 해에서 바로 이깜포산토의 그림「죽음의 승리」를 보고「죽음의 무도」라는 곡을 착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74살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리스트는 로마대상을 받고 이탈리아에 유학 온 젊은 드빗시에게 바로 이 그림을 보기를 권하고 팔레스트리나와 핫수스 등의 중세교회음악을 연구하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미켈란젤로 부노나룻티가 여기 왔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이 깜포산토의 프레스코 그림은 어쩐지 시스틴성당의 벽화 최후의 심판을 연상케 된다. 더구나 대성당 내부의 한 예배소에 브론지노가 그린 피부가 벗겨진 성 바르톨로메오를 보고 나면 왜 미켈란젤로가 성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자신의 피부와 얼굴에 자기(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을 새겨넣었는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상념이 어느덧 스물스물 다가오는 해무속에서 너울너울 넘나든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피사의 사탑 중루마저 안개에 휩싸여 희미하게 보인다.
갈릴레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낙하이론을 수정하기 위하여 부피가 같고 질량이 서로 다른 물체를 가지고 사탑으로 올라가서 동시에 떨어뜨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남쪽으로 기울어진 8층의 발코니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죽음의 승리가 내게 주는 음산한 분위기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트라이니 그림에서 희미하게 읽을 수 있는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온갖 행복이 나를 저버렸으니/모든 고뇌에서 구해주는 죽음이여, /어서와서 우리에게/최후의 만찬을 베풀어다오」
「지식도 돈도/또 삶도 용기도/그(죽음)의 일격을 막을 길이 없구나」
살아있음을 뽐내는 사람 특히 이 그림에서와 주인공과 같이 권력자와 가진자들이 이 장소를 한번 둘러보고 나면 좋으련만….
새하얀 돌산으로 뒤덮인 카라라 지방을 지나는 내 마음은 아직도 중세의 망령에서 못 벗어나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윽고 안개등을 켜고 리비에라를 따라 북상하여 잠시 이탈리아의 중세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안개속에서 태양의 고속도로라는 이름의 무상을 느끼며 헤르만 헷세의 싯귀를 중얼거린다.
「Jeder ist Allein(누구나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