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예수의 빈무덤과 무심/장덕필 신부

장덕필ㆍ신부ㆍ서울 수유1동본당주임
입력일 2019-02-15 11:45:53 수정일 2019-02-15 11:45:53 발행일 1991-03-31 제 1748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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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예수의 부활과 빈 무덤’이란 논단(신학전망92호 이영헌 신부)을 읽었다. 예수 부활의 증거를 위한 빈 무덤의 역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는 글이었다. 원전의 전승에 가깝다고 본 마르코 16장 1절부터 8절을 중심으로 펼쳐진 예수의 빈 무덤 사화는 세 명의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하는데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을 걱정했지만 커다란 돌은 이미 굴려져 있고 무덤 안에서 흰옷을 입은 젊은이가 “겁내지 마라.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먼저 갈릴래아로 가셨으니 거기서 그분을 만나라”하는 것이었다. 이 사화의 줄거리가 빈 무덤에 대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예수 부활의 증거를 위해 빈 무덤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게 한다.

금년 부활을 지니는지 깨닫게 한다.

빈 무덤의 사화가 주는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메시지를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신앙의 중심이 되는 예수 부활을 각자 피부와 심장에 와닿는 외적 내적 인식을 실감해야 하는 것이다. 빈 무덤 사화는 ‘무덤에 갇혀진 자의 해방과 죽음의 벽을 뛰어넘는 부활을 시사하는데 기여하는’ 메시지로서 우리 삶속에 다이나믹하게 생동하는 증거이다. ‘빈 무덤 안에 예수의 시신이 없다’는 사실은 ‘예수 부활’을 전제하지만 ‘빈 무덤이었기에 부활하신 것’이 아닌, ‘부활하셨기 때문에 시신을 볼 수 없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는 확실한 부활신앙을 체험하게 한다. 진정「빈 무덤은 예수부활에 대한 표징」이라고 한 성서학자의 신념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복음사가는 꼭 빈 무덤 사화로 우리에게 예수부활의 체험을 전달하려는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바울로 사도가 “당신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비 2,7)”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결정적 절규를 토로한 걸보면 빈무덤의 메시지를 통한 오늘의 부활체험을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쳐 말해 빈 무덤은 우리 마음의「비움」을 계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원칙을 우리가 믿고 생활화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하느님 모습을 버리셨고 전지전능하신 무한성을 감추셨고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을 비우셨고 자신의 생명과 삶 전체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쏟아 버리셨다.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으신(이사야 53,23)분이 되셨고 부요하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Ⅱ코린토 8,9)분이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철저히 자신을 비하(卑下)하여 완전히 비운 모습을 보이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의 절정인 무덤을 비우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자신과 교회와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비움체험의 예수 그리스도 메시지이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이나 신념을 성취하기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을 한다. 비웠기 때문에 진(眞)과 허(虛)를 분명히 판단하거나 구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슬퍼런 유신체제아래 인권회복을 위해 반기를 들고 감옥에 갇혀서도 평화롭고 진리증언에도 자유로웠던 것은 당시 천주교가 세속에 대해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계속 비우기 위해 노력해 왔는가. 오히려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은 아닌가.

밖에서는 가진자가 전쟁에 승리하여 없는자를 계속 착취하고 짓밟고 있으며 약육강식 논리에 길든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승전을 축하하고 있다. 나라 안 풍경도 다를바 없다. 권력을 가진자들은 가진편의 유지를 위해 평생 한 번의 집마련할 기회를 빼앗고, 빼앗기고도 하소연조차 못하는 이들은 어쩔도리 없이 있는자의 폭력을 비호하는 것이 세태인 것이다.

교회 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과 정의·진리의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공동체 구성원 간에 자기합리화의 체제유지를 위해 있는자의 힘을 빌려 가진자의 변을 대신하려한다. 못가진자라고 하는 편에서도 가진자를 미움과 투쟁의 대상으로 여길 뿐 자기 것을 조금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점은 거의 같다.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똑같이 비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서로 자신을 비우며 ‘내 탓이오’ 해야 할 사람들이 서로 ‘네 탓이오’하며 합리화시키기에만 급급한 우리들의 모양새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선 어떤 심정으로 보고 계실 것인지……. 한때 비우려고 했던 우리 공동체가 정의를 위해 노력하며 쌓은 탑을 헐어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행여 우리는 지금 힘가진 편에 서서 비움을 통한 부활체험에 역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월록(指月錄)에 한 승려가 위산(爲山)스님께 묻기를 “도(道)가 무엇입니까?” “무심(無心)이 바로 도일세”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그대가 할일을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일세” “그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다름 아닌 바로 자네일세” 했듯이 ‘비워야 한다’는 결정은 이해하는 내가 마음을 먹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나 자신의 결정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사화를 통하여 누구나 구원의 절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놓아야하는 메시지를 주셨고 이 메시지는 내 마음을 비워야 비워지는 것이다.

오늘의 부활체험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의 비움으로 자유롭게 갈릴래아로 가서 영광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새마음으로 새공동체를 만나는 체험을 해야만 한다.

장덕필ㆍ신부ㆍ서울 수유1동본당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