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5월 21일 무자비한 종교탄압에도 꿋꿋이 지킨 성심… 멕시코교회 횃불 되다 1910년대 정권 잡은 멕시코 혁명정부 가톨릭교회 활동 전면 금지 초토화 사제 비롯한 저항운동가들 암살 만행 비폭력·평화 부르짖은 하라 신부 등 날조된 반란 혐의 받고 총살형 순교
성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Cristobal Magallanes Jara)와 동료 순교자들은 삶의 중심을 그리스도에 두고 가톨릭교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1920~1940년대 교회를 박해하는 멕시코의 혁명정부에 대항해 평화적으로 대항했던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 신부를 비롯한 25위의 성인은 박해자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박해자들을 용서하고 자신들의 생명을 주님께 의탁했다. 양심에 따라 신앙을 지키고 증거했던 성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와 동료 순교자들의 삶을 알아본다.
멕시코 혁명정부의 교회 박해
오늘날 멕시코는 대표적인 가톨릭국가다. 브라질 다음으로 가톨릭신자가 많은 나라로 멕시코의 가톨릭신자는 약 1억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불과 100여 년, 무신론으로 무장한 멕시코의 혁명정부는 가톨릭교회를 박해했다. 1917년 헌법을 개정하고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미명 아래 반가톨릭적인 조항을 삽입한 혁명정부는 토지개혁을 명분으로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교회의 교육 사업을 막는 등 가톨릭교회의 활동을 억압했다. 당시 혁명정부 지도부는 가톨릭교회를 악의적으로 조롱하고 억압했다. 1920년대 멕시코 타바스코 주지사로 교회를 박해했던 가리도 카나발은 세 아들을 각각 ‘레닌’과 ‘사탄’, ‘루시퍼’로 이름 지었고, 기르던 가축들을 ‘하느님’, ‘교황’, ‘마리아’, ‘그리스도’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는 타바스코주에 있는 모든 공공건물과 묘지에서 십자가를 없앴다. 카나발은 역시 교회를 박해했던 당시 대통령 플루타르코 카예스 정부에서 장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카예스는 소노라 주지사 시설 모든 가톨릭 사제를 추방시켰고, 대통령이 돼서는 20세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며 악의적으로 멕시코의 가톨릭교회를 초토화시켰다. 멕시코 혁명정부는 공공장소에서 수단을 입은 사제에게 벌금을 물리고, 정부를 비방하는 사제에게는 최대 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몇몇 주에서는 사제 한 명만이 주 전체를 사목하도록 강요했다. 외국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됐고, 성당과 교회가 운영하던 학교, 신학교들은 문을 닫아야했다. 당시 사제들은 아무 이유 없이 살해됐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크리스테로 전쟁’(Cristero War, 1926~1929)을 벌였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저항운동이었지만, 교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고 사제들이 살해되자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교황청과 미국의 중재로 교회와 멕시코 정부는 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부는 이후로도 10년 동안 사제들을 비롯해 크리스테로 전쟁 참가자들을 암살했다. 휴전 이후 1940년 가톨릭교회에 우호적인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살해된 이들이 약 5500명에 이른다. 교회의 피해는 참담했다. 1926년부터 1934년까지 최소 40명의 사제가 암살됐다. 4500여 명에 이르던 사제 수는 1934년에는 334명만 남았다. 나머지 사제들은 추방되거나 제명되거나 죽었다.신앙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
성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와 동료 순교자 24위는 크리스테로 전쟁 당시 교회의 억압에 맞서 목숨바쳐 저항한 이들이다. 대표 사제인 크리스도발 마가야네스 하라 신부는 1869년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주 토타티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동으로 일하던 하라 신부는 19살에 과달라하라에 있는 산호세 신학교에 입학했다. 1899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과달라하라 성령예술학교 교목으로 사목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고향인 토티타케의 한 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아 목공예품 상점을 세우고 칸데라리아 댐 건설을 돕는 등 고향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하라 신부는 멕시코 서부 시에라마드레 산맥에 살던 소수민족 후이촐족의 복음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져 아스구엘탄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에 선교 기관을 설립했다. 1914년 멕시코 정부가 과달라하라의 신학교를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하라 신부는 자신의 본당에 신학교를 열 것을 제의했다. 1915년 7월 토타티케 신학교를 열었고 과달라하라대교구장 호세 프란치스코 오로스코 이 히메네스 대주교의 인준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비밀리에 이뤄졌고, 하라 신부는 정부의 미사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했다. 하라 신부는 교회 단체들이 무력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방식에 반대하며 많은 저술과 설교를 통해 무장세력을 설득했다. 하지만 하라 신부는 크리스테로 전쟁에 참여해 정부의 전복을 노렸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했고, 1927년 5월 21일 미사 주례를 위해 한 마을로 가는 길에 동료 사제 성 아우구스토 칼로카 코르테스 신부와 함께 체포됐다. 코르테스 신부는 하라 신부의 동료 순교자 중 한 명이다. 하라 신부와 코르테스 신부는 재판도 없이 총살형에 처해졌다. 하라 신부는 자신의 남은 소지품마저 집행관들에게 넘겨줬고 집행관들이 지을 죄를 미리 용서했다. 그는 “나는 죄가 없이 죽는다”면서도 “나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마음을 다해 용서하며, 주님께서 내 피를 분열된 멕시코의 평화를 위해 흩뿌리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성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와 동료 순교자 25위 중 22명은 사제이며 3명은 평신도다. 모두 크리스테로 전쟁 참가자였지만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멕시코 혁명정부가 미사와 세례성사를 비롯한 모든 활동을 금지했지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세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 이들을 시복했고, 대희년이던 2000년 5월 21일 이들을 모두 시성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시성식 강론에서 “이들은 멕시코 땅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증오를 촉발하는 박해가 심각해졌을 때에도 자신들이 맡은 직책을 용기있게 수행했다”면서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자유 의지로 평온하게 순교를 받아들였고, 박해자들을 용서했다”고 밝혔다. 성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와 동료 순교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성실한 믿음과 가톨릭 신앙에 충실했던 자세로 오늘날 전 세계 모든 교회와 특히 멕시코 사회에 큰 모범이 되고 있다.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