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으면 새로운 삶을 시작한 북향민(북한이탈주민)입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도 벌써 7년이 됐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려 한국 땅에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엊그제 같은데, 7번의 춘하추동을 보냈습니다. 계절의 바뀜과 더불어 저의 삶에도 여러 가지 변화들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저의 한국에서의 새로운 삶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저의 고향은 ‘함흥냉면’의 고장 함경남도 함흥입니다. 평범한 노동자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나 부모님 슬하에서 부러운 것 없이 생활하던 저희 가정에도 1994년도의 자연재해, 경제적 어려움은 예외가 아니었답니다. 하여 어머니와 저는 중국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함경북도 무산으로 갔습니다.
1990년대에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은 한국으로 돈을 벌러 오다 보니 저희 친척집도 역시 한국행을 하고 중국에는 어르신들만 있어서 저희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함흥에서는 아버지와 언니가 저희가 중국 친척의 도움을 받아 오길 손꼽아 기다리는데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여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중국에 가서 돈이라도 벌어서 돌아갈 생각에 1차 탈북을 하게 됐습니다.
1997년 12월 어머니는 야밤에 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성 옌지에 와서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이국땅에서 언어도 안 되는 사람을 누가 돈을 벌라고 하겠나요?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지인의 소개로 헤이룽장성 닝안이라는 곳으로 가서 농사를 짓게 됐습니다.
12살 한창 공부할 나이에 이국땅으로 간 저에게 농사일을 시킬 수 없었던 어머니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한족(중국인)학교에 4배의 학잡비(등록금)를 내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입학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저는 13살부터 중국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에서 공부하던 2002년 5월 어느 날, 어머니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한으로 송환되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은 불법체류자이므로 일단 중국 공안에 잡히면 북송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와 저는 생이별을 하게 됐는데요. 어머니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시면서 저에게 꼭 다시 돌아온다고, 열심히 공부만 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하지만 북송된 어머니는 1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글 _ 허영희 알레나(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봉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