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를 보내주십시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장자호 신부(상)

박효주
입력일 2024-07-04 수정일 2024-07-10 발행일 2024-07-14 제 3401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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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도 가는데 선교지는 왜 못가겠나”…겁내지 않고 한국행 택한 이탈리아 신부

서울 국제(외국인)본당 주임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장자호 신부(요한 가롤로·82)가 한국에 온 지 55년이 됐다. 고(故) 범덕례(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를 따라 한국에 와 선교한 세 조카 사제 중 한 명이었던 장자호 신부. 1969년에 이미 지구인이 달나라도 갔는데 자신이라고 선교지는 못 가겠나 싶었다는 당찬 그의 생애와 한국 생활, 선교 사제로서의 사목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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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서품을 받고 있는 장자호 신부. 장자호 신부 제공

작은아버지 따라 선교 사제가 되다
“어릴 때부터 선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장자호 신부는 1942년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근처의 시타델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장 신부는 그가 네 살쯤일 때 중국으로 선교를 떠난 작은아버지 범덕례 신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또 초등학생 시절 주일학교를 가면 본당 신부님이 전교 잡지를 자주 보여줬다. 덕분에 그는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선교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장 신부는 196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를 자원했다. 그는 결국 바람을 이루었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자원은 받지만 수도회 차원의 계획이 우선시 되는 상황이었기에, 당시 관구장은 장 신부에게 아르헨티나에 갈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한국에 파견돼 있던 범 신부는 우연히 총본부 모임을 위해 한국을 떠나 관구장을 만나게 됐고,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니 조카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범 신부의 부탁을 통해 장 신부는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호랑이 아들 ‘장자호’ 
“성은 장, 이름은 ‘호랑이 아들’이라는 뜻의 아들 자(子), 범 호(虎)로 하자.”

외국인 선교 사제가 한국에 오면 한국 이름을 만들곤 한다. 장 신부의 본명은 잔카를로 팔다니(Giancarlo Faldani). 1969년 한국에 와서는 이름의 시작인 ‘잔’과 비슷한 ‘장’을 성으로 삼아 장 신부가 됐다. 그런데 첫 본당 보좌 신부로 갔을 때 할머니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범 신부님이 장 신부님 작은아버지라는데 어떻게 성이 다르지?”

이 말을 전해 들은 범 신부는 장 신부의 이름에라도 자신의 성을 넣자며 호랑이의 아들이라는 뜻의 ‘자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래서 장 신부의 별명은 ‘호랑이 새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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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6월 5일 부산교구 대연본당 선교 25주년 축하식에서 장자호 신부(왼쪽 첫 번째)가 부산교구 초대교구장 최재선 주교(왼쪽에서 네 번째)와 범덕례 신부(왼쪽에서 다섯 번째) 등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장자호 신부 제공

군부 탄압을 견디다
“제가 몰래 알려드리는데, 신부님 이름에 빨간색 표시가 있어요.”

한국에 와서 30년간은 부산교구, 대구대교구, 인천교구에서 각각 10년씩 본당을 맡아 사목했다. 주임신부로 있던 부산 대연동본당 옆엔 오륙도 나병환자촌이 있었는데 그 환자들의 자녀들을 수도원으로 데려와 돌보기도 했다. 아이들과 같이 놀고 생활하는 일이 참 보람 있었다.

장 신부는 한국에 그늘져 있던 군부의 탄압도 받았다. 특히 초대 원주교구장을 지낸 고(故) 지학순 주교(다니엘·1921~1993)가 1974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체포됐을 때,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시국미사에 참석했다가 사진이 찍힌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장 신부가 본당에서 강론할 때면 형사가 와서 감시하곤 했다. 장 신부는 “아마 강론 내용도 모두 녹음해 갔을 것”이고 말했다.

행정상의 불이익도 받았다. 한국 체류 기간을 연장하러 기관에 가자, 직원은 이 서류, 저 서류를 다 요청하며 절차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도 겨우 6개월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일을 보고 담당 직원과 단둘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장 신부가 절차를 왜 이렇게 어렵게 하냐고 직원에게 묻자, 직원은 그의 이름에 반동분자라는 표시가 있어서 그랬다고 몰래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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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함께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작은아버지 범덕례 신부(가운데)와 장자호 신부(오른쪽), 사촌 동생 배문호 신부(왼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강산이 다섯 번 변한 한국

“언젠가는 매년 두세 번 있던 세례식 때 100명 이상씩 영세를 준 적도 있죠. 내가 잘한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한국을 많이 축복하셨어요.”

장 신부는 한국교회 성장의 산증인이었다. 그가 입국했을 즈음인 1970년 신자 수는 약 79만 명이었지만 현재 신자 수는 600만 명에 육박한다. 특히 1980년대에는 한해 약 7%씩 신자 수가 늘었다.

그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발전도 몸소 겪었다. 장 신부가 부산교구에 있던 1969년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야 했는데, 그때만 해도 경부고속도로가 서울-대전만 개통됐을 때였다. 부산에서 대전까지 비포장도로를 트럭으로 운전해 오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 그땐 서울에서도 강남은 논밭인 상황이었다.

2000년 대희년에 서울 국제본당으로 옮긴 장 신부는 외국인을 위한 새로운 본당에서 그의 사목 생활을 시작했다.<계속>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