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희년에 짚어보는 ‘희년 역사’

이주연
입력일 2025-01-20 10:12:27 수정일 2025-02-05 17:05:32 발행일 2025-02-09 제 342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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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최초 개회…이후 100년·50년·33년 등으로 주기 변화

지난 12월 24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이 열리면서 시작된 이번 희년은 2000년 희년에 이은 정기 희년이다. 레위기(25장 8절)로 그 의미가 거슬러 올라가는 희년은 1300년 시작됐다. 희년을 지내며, 그 역사적인 변천과 희년에 얽힌 주요 이야기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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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최초의 성년을 선포하고 있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 출처 가톨릭대사전

보니파시오 8세 교황(1294~1303)은 1300년 로마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100년마다 한 번의 희년을 선포할 것이라는 내용의 교서 「옛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을 발표했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희년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교황은 교서를 통해 “앞으로 100년마다, 경건하게 이(베드로·바오로) 대성당들을 방문하는 이들과 진실로 참회하고 고백하는 이들, 또는 앞으로 참회하며 올해와 100년마다 이러한 방법으로 참여할 이들에게 본인은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해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욱 너그럽고 가장 완전한 용서를 허락하며 앞으로도 허락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1343년 클레멘스 6세 교황(1342~1352)은 50년마다 희년을 거행한다고 정했다. 이후 1350년 제2차 희년이 거행됐으나, 교황은 프랑스 아비뇽에 감금돼 있었다. 때문에 이 희년은 교황 없는 유일한 희년으로 남았다.

우르바노 6세 교황(1378~1389)은 예수의 33년 공생활 기간에 의미를 부여했다. 50년 주기 희년을 33년마다 개회하도록 정한 후, 1390년을 ‘구원의 희년’으로 선포했으나 갑작스레 선종했다. 후임 보니파시오 9세 교황(1389~1404)은 이에 따라 제3차 희년을 치렀으나 다시 50년 주기 전통으로 복원해 1400년 제4차 희년을 열었다. 하지만 전염병이 유행해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검은 희년’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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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마다 희년의 해가 돌아오면 불던 숫양의 뿔 모양을 한 요벨. 출처 가톨릭대사전

마르티노 5세 교황(1417~1431)은 1423년 희년을 두 번째 '구원의 희년'으로 거행했다. 1390년에 기념한 구원의 희년으로부터 33주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라테라노 대성당의 성문(聖門)을 여는 예식이 처음 시작됐으며, 로마 4대 성당 순례지가 완성됐다. 아울러 희년을 다시 50년마다 지내는 규정이 마련됐다.

‘성년’(희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제안한 이는 바오로 2세 교황(1464~1471)이다. 이와 함께 25년마다 성년을 거행하도록 했는데, 이 전통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1492~1503)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은 교황이, 다른 3개 대성당 문은 그가 임명한 3명 추기경이 열게 했다. 그리고 폐막하면 성문을 벽으로 막는 전례 규정을 정했다. 이 예식은 오늘날 희년의 본질적인 예식이 됐다.

로마에 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희년의 은사가 베풀어지도록 한 것은 율리오 3세 교황(1550~1555) 때였다. 교황은 지중해에서 해적들과 싸우는 군인들과 전쟁터에 나가 있는 모든 군인에게 로마를 순례하지 않아도 희년의 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밖에도 1750년 희년 때 베네딕토 14세 교황(1740~1758)은 성년의 은사를 받기 위해 반드시 영성체해야 한다는 규정을 덧붙였다.

한국교회와 관련이 깊은 희년은 1925년이다. 비오 11세 교황(1922~1939)이 기념한 이 희년 동안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한국 순교자 79위가 시복됐다. 리지외의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시성됐고, 루르드 성모 발현을 목격한 베르나데타 수비루는 복자 반열에 올랐다.

1950년 희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1939~1958)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광장에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 교의로 선포된 것도 기억할 만하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