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본당에서 형제님들 구역모임이 있었다. 형제님들 모임은 보통 저녁에 간단한 식사와 함께 주(酒)님(?) 한잔 마시면서 자유롭게 생활나눔을 했다. 모임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나이가 가장 많은 형제님이 자신의 깊은 속내를 이야기했다.
“저는 배우지도 못하고 시골에서 올라와 막일부터 안 한 일 없이 갖은 고생을 하면서 성실하게 일했어요. 결혼도 혼기를 놓쳐 늦은 나이에 했어요. 그리고 늦둥이 아들을 보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하며 키웠어요.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무척 순종적이라 사실 기대도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겨울날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방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봤어요. 너무 실망과 배신감이 커서 화를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손찌검을 했어요. 그리고 옷을 벗겨 문밖으로 쫓아냈어요. 한 시간쯤 뒤에 아들도 집안으로 들어와서 무릎을 꿇긴 채 한바탕 훈계를 했지요. 다음 날부터 말도 많던 아이가 집에서는 입을 닫았어요. 이후로 아들은 내가 대화를 시도해도 건성으로 듣기만 했어요. 벌써 20여년이 지났고 아들도 가정을 꾸렸는데 지금도 나에게 아주 냉담해요. 시간이 많이 흘렀고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하나요 신부님?”
그 형제님은 끝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아버지는 큰 상처라고 하시지만 아드님의 상처도 상상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사춘기 학생이 옷이 벗겨진 채 문밖에서 추위에 떨며 느꼈을 창피함은 상상 이상의 큰 상처가 되었을 것 같다.
이사악을 묵상하면서 갑자기 든 옛 생각이다. 100세에 어렵게 얻은 아브라함의 늦둥이 아들, 이사악은 번제물로 바쳐지기 전 성화에서 보여주듯 공포 그 자체였을 것 같다. 아버지의 칼날이 무자비하게 아들을 향할 때 이사악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만 해주던 아버지가 칼을 들고 갑자기 어린 아들인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 이사악이 순종적이라 아버지를 밀치지 못했을까? 죽음 앞에서 그 누구든 본능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다. 생각할 여유나 이유도 없이 사고처럼 닥친 상황에서 이사악은 그 자리에 그냥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이사악에게 아버지는 범접할 수 없는 큰 산과 같은 상대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카리스마와 할아버지와 손주같은 나이 차이를 고려해 봐도 그렇다. 성경에서도 부자(父子)는 정반대의 성격이다. 이사악은 도전이나 갈등과 다툼을 싫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닮은 면도 있었다. 이사악이 그랄 지방에 머물며 살게 되었을 때 예쁜 레베카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에게 부인을 누이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해 위기를 넘겼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악은 다른 이들이 보았을 때 너무 답답하고 소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악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보통 우리들도 위기가 오면 비슷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조금은 위안이 된다.